코끼리가 사랑을 나눠도 풀밭은 망가진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 중국, 북한과 한편에 선 트럼프
2025-02-27 17:43:16 2025-02-27 17:43:1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국제 정치는 역시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약육강식의 강대국 정치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3년을 맞은 지난 24일(현지시각) 유엔 총회와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에서 벌어진 장면들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우크라와 유럽연합(EU)은 러시아를 비판하고 우크라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유엔 총회에 냈다. 우크라 전쟁을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략"으로 규정하면서 우크라 영토에서 러시아가 "모든 군 병력을 즉시, 완전히, 조건 없이 철수"하고 적대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 결의안은 찬성 94표, 반대 18표, 기권 65표로 가결됐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전 종전 협정을 벌이고 있는 미국 트럼프정부는 이 결의안에 반대했다. 우크라를 침략한 러시아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를 지원해 파병까지 한 북한, 그리고 이란, 이스라엘과 함께였다. 1945년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미국, 러시아, 북한, 이란, 이스라엘이 같은 편에 서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총회에서 머릿수에 밀린 트럼프정부는 결국 유엔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를 움직였다. '러시아의 침략' '우크라이나 주권과 독립, 영토보전' 내용을 뺀 결의안을 안보리에 냈고 이 결의안은 결국 찬성 10표(미국·러시아·중국 등), 반대 0표, 기권 5표(영국·프랑스 등)로 가결됐다. 유엔 총회 결의안은 국제 여론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구속력은 없다. 반면, 안보리 결의안은 회원국에 준수 의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구속력을 갖는다.
 
안보리에서 트럼프정부중·러와 함께 영·프 무력화
 
공공연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하겠다는 트럼프정부가 P5(안보리 상임이사국)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고 미국의 최대 동맹인 대서양 동맹의 영국과 프랑스를 무력화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우크라전 종전 협상을 하면서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피해당사국인 우크라를 배제해 버렸다. 또 전쟁원조와 재건 지원 등에 대한 대가로 우크라의 광물 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익 절반을 미국이 갖는 ‘광물 협정을 압박하고 있다.
 
"코끼리가 싸워도 풀밭이 망가지지만 코끼리가 사랑을 나눠도 풀밭은 망가진다." 이 같은 국제정치의 비유가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장면이다. 우크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아도 부족할 참극이지만 약소국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대국 정치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다.
 
힘이 딸리는 유럽도 머리가 복잡하다. 차기 독일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교민주당 대표가 "영국, 프랑스의 핵방위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프랑스 정부가 핵무기 탑재 전투기 배치 등 핵 확장 억지력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고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트럼프를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내는 인물일 수 있다”고 했다. 그 진단대로 트럼프는 자신의 당면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의 동맹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2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산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 통합을 이루는 사람(peacemaker and unifier)으로서의 유산일 것"이라고 했다. 노벨평화상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트럼프는 우크라전을 종결 짓고 나면 그는 그 동력 즉,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활용'해 가자 전쟁과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나서려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트럼프의 재집권을 계기로 "워싱턴·모스크바·평양 사이에 새로운 협력 체계가 구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25일 <채널뉴시스> 인터뷰)
 
트럼프는 2017년 1기 집권 때 러시아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중동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러시아 스캔들'로 무산됐다. 8년이 지난 현재도 같은 구상을 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중이던 지난해 10월31일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하도록 미국이 밀어붙이는 것은 '수치'이고 '멍청하다'고 당시 바이든정부를 비판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균열을 내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지난 24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화상통화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성공할 수 있을까.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우크라전 관련 '친러시아' 결의안을 통과시킨 지난 24일 푸틴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화상으로 통화했다. 푸틴이 우크라전 종전 협상 상황을 시진핑에게 브리핑한 이 통화에서 양 정상은 '진정한 친구'를 부각했고 특히 시 주석은 양국의 동반자 관계에는 "제한이 없다"고 했다. 양국 연대가 미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전 종전 협상으로 약해지지 않을 것임을 외부에, 특히 트럼프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대였다.
 
국제정치에 트럼프2기 설 자리 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의 강대국 정치가 본격 작동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 24일 한국은 우크라가 발의한 '반러' 유엔 총회 결의안에도 찬성했고 미국이 주도한 '친러'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도 찬성했다.
 
윤석열이 '생즉사 사즉생'이라며 포탄 우회공급 등으로 우크라를 적극 지원해온 한국이 기권도 아니고 찬성까지 것은 면목 없는 행동이지만 외교부는 "한·미 관계 및 북한 문제 관련 한·미 간 긴밀한 공조의 중요성 등도 종합 고려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트럼프가 러시아 손을 잡았으니, 앞으로 트럼프정부를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현 UN대사가 윤석열이 대선 후보 시절 후원회장을 맡았던 황준국이라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더 눈길을 끈다. 이 정부가 출범 전부터 목청 높이 외쳐온 가치외교 정확히는 이념·진영 외교만으로는 '트럼프의 귀환'에 따라 더욱 복잡다단해진 국제 정세에서 제 방향을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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