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전 벌이는 젤렌스키(왼쪽)와 트럼프.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쫓겨났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JD 밴스 부통령에게 젤렌스키가 "푸틴(러시아 대통령)은 약속을 반복해서 어겼다, 무슨 외교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박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당신에게는 카드가 없다, 우리가 없으면 카드가 없다"고 했고 밴스는 "무례하다"고 몰아붙였다. 공개 정상회담 자리에서 '무례'라는 표현이 등장한 적이 역사에 있었을까? 심지어 백악관 출입기자 등 미국 측은 젤렌스키의 복장 문제까지 지적했다.
미국은 이에 앞서 러시아와 우크라전 종전 협상을 시작하면서 푸틴의 요청대로 피해 당사국인 우크라와 핵심 관련 세력인 유럽연합(EU)을 완전 배제한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트럼프에게 매달리러 온 젤렌스키를 이렇게까지 냉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현대사 최대의 외교 참사"(영국 '가디언'), "미국은 '자유 세계의 리더'가 될 자격을 잃었다"(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으나 미국은 신경도 안 쓴다.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응수했다. 우크라의 나토 가입과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 영토를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2014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젤렌스키가 퇴진해야 한다는 노골적 압박이다.
미국 안보 초석 '대서양 동맹' 흔들…EU, '유럽 재무장 계획' 발표
대서양 동맹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안보의 초석이었다. 1949년에 창립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미·일 동맹, 한·미 동맹에도 없는 '유사시 자동개입'이 명시돼 있다. 역대로 미군 4성 장군이 나토군사령관을 맡았고 그 지휘 아래 모든 정보와 작전 실행을 사실상 미군이 주도해왔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탈퇴하겠다고 했고 우크라전 종전 협상에서 트럼프가 러시아 편을 들면서 유럽도 '미군 없는 유럽'을 고민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차기 독일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미국을 더는 유럽의 동맹으로 간주할 수 없다"(도미니크 드빌팽 전 프랑스 총리)고 한다. '유럽 자강론'이다.
"나토의 마지막 나날이 지나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제임스 스태브리디스 전 나토 최고사령관의 발언(3일 '월스트리트저널')이 현재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나토가 해체된다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2차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럽은 '자강'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6일 열리는 EU 정상회의에 앞서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약 8000억유로(1229조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 Plan)을 제안했다. 그는 "우리 앞에 놓인 진짜 질문은 유럽이 상황에 따라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가 돼 있는지 여부"라며 "우리는 재무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유럽은 국방비를 대폭 늘릴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5일 자 '유럽은 복지국가를 축소하고 전쟁국가를 건설해야 한다'(Europe must trim its welfare state to build a warfare state)는 기사로 유럽이 느끼는 위기감을 전했다.
역시 미국과 동맹관계인 우리가 현재의 유럽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는 없다.
"자력안보 일깨운 '미·우크라 대충돌"(매일경제), "안보협정 믿고 핵·영토 내줬지만…누구도 우크라 지켜주지 않았다"(조선일보) "美 한발 뺀 한반도’ 대비해야"(동아일보 사설‘), "'한·미 동맹 맹신'에서 깨어날 필요 일깨운 미·우 회담"(경향신문 사설) 등등. '트럼프의 미국'에만 기대지 말고 한국도 '자강'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이 쏟아지면서 트럼프를 설득하기 위한 세세한 접근 방법부터 북·중·러와의 관계 회복에 자체 핵무장론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당연한 주장들 속에 정작 자력 안보, 자강의 핵심인 전작권 전환 문제는 쏙 빠져 있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6년에 한·미 양국이 2012년 4월 17일에 전작권을 전환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명박정부가 이를 2015년 12월로 연기했다. 급기야 2015년에 박근혜정부가 미국과 전작권 전환을 '시기'가 아니라 '조건에 기초한 전환 방식'으로 바꿔버렸고 문재인정부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작권은 잊혀진 용어가 됐고, 입에 올리는 사람도 없어졌다.
미 상원 인사청문회 참석한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자.(사진=연합뉴스)
뜻밖에 미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자가 쏘아 올린 '전작권 전환'
그런데 뜻밖에 미국에서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자가 4일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전시작전권 이양이 조건 기반으로 돼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이 민감한 문제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 아래 "한국같이 유능하고 의욕적인 동맹국에 힘을 실어주는 것(empowering)이 트럼프의 외교정책 비전"이라고 답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5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전작권 전환이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이뤄져야 한다"면서 "한국이 이양받을 준비가 안 됐더라도 준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국은 중국 대응에 주력하고 한국이 자기 방어를 스스로 책임지게 해야 한다는 차원이었다.
<폭스뉴스> 진행자 출신인 피트 해그세스 국방장관과 억만장자 투자자 스티븐 파인버그 국방 부장관 지명자 모두 국방 분야 경험이 없는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콜비가 트럼프 2기 국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수립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그의 발언이 나오면서 오래간만에 전작권 전환 논의가 탄력을 받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어쩌면 한국에는 전작권을 가져올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윤석열 파면'이 결정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다면, 이 문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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