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간첩)③(인터뷰)"황당한 국정원 수사, 코미디 같았다"
9월25일 대법원 "민주노총 간첩단, 실체 없다" 판결
무죄 확정된 양기창, 본지 인터뷰서 '국정원 비판'
국정원 '민간인 사찰' 정황…14개월간 수감 생활도
양씨 "분단국가서 국보법 폐지 안 되면 같은 일 반복"
2025-10-02 06:00:00 2025-10-02 06:00:00
[광주=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국가정보원은 2023년 1월 이른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수사했습니다. 민주노총 안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비밀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겁니다. 윤석열씨는 지난 2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12·3 계엄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이 사건을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사건의 핵심 쟁점이 된 비밀 조직에 관해 실체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피고인 4명 중 2명도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35년 가까이 광주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양기창씨가 바로 무죄를 받은 2명 중 한 명입니다. 양씨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에 관한 일부 언론을 통해 '북한에 충성맹세'를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양씨가 지난달 29일 광주 모처에서 <뉴스토마토>와 만나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양씨는 황당한 국정원 수사 과정에 절로 웃음이 났지만, 14개월간의 수감 생활과 간첩 낙인, 특히 8년여간 이어진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을 생각하면 웃을 수만은 없다고 했습니다. 
 
허술한 압수수색,떠들썩한 보도에도 '압수품' 고작 4개 
 
국정원은 양씨가 2019년 8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출신 석모씨 소개로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 2명과 접선, 지령을 받고 목적 수행을 협의한 뒤 귀국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양씨는 당시 베트남에 가서 북한 사람 2명을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그에게 국가보안법상 특수잠입·탈출, 회합·통신 등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또 석씨가 문화교류국과 주고받은 문건에 양씨가 100여 차례 나온 점을 근거로, 양씨가 북한의 지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024년 11월 1심 재판부는 검찰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 양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5월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 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양씨가 주장한 △베트남에서의 만남은 평범한 북한 사람들과의 술자리라고 생각했다 △석씨와 문화교류국이 나눈 문건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등의 내용이 받아들여진 겁니다. 대법원도 지난달 25일 원심 판단이 맞다고 판결, 양씨의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대법 판결까지 그는 구속과 보석, 재구속을 거치며 14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민주노총 간첩단' 피고인 중 한 명인 양기창씨가 지난달 25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뒤 29일 광주 모처에서 <뉴스토마토>와 만나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양씨는 2023년 1월18일 오전 9시 국정원 등 공안당국의 동시다발적 압수수색으로 처음 이 사건을 인지했다고 합니다. 압수수색 대상은 양씨의 신체·차량·주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양씨는 압수수색 과정이 허술했다고 말합니다. 국정원 등은 영장 집행 전부터 양씨 가족과 집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압수수색 당일엔 국정원 승합차, 경찰버스, 국정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은 수사관들이 양씨 주거지와 사업소 앞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시 양씨 주거지엔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기아차 공장에서 교대제로 일하는 양씨는 '새벽 출근조'라 이미 일터로 나간 뒤였습니다. 마침 가족들도 집에서 없어서 주거지 압수수색도 늦어졌습니다. 또 국정원 등이 양씨 행방을 알지 못한 탓에 그해 1월 중순 설 연휴가 지나서야 신체 압수수색이 진행됐습니다. 양씨는 당시 일을 떠올리면서 "압수수색 과정이 황당했다"며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압수수색은 언론에 거창하게 보도됐지만, 정작 압수된 물품은 4개에 불과했습니다. 예전에 고장 난 양씨의 노트북, 딸이 쓰던 노트북, 노조 활동 때 사용하던 USB, 25년 전 사은품으로 받았던 공책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석씨 집에서 양씨가 출간한 첫 시집 '불사조의 사랑'이 압수품에 포함된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양씨는 공안당국에 의해 압수품이 어떻게 쓰일지 몰라 불안했다고 합니다. 공책엔 1990년대 청년문학회 활동을 할 때 적은 '종자론과 창작법', '자주적 문예운동관' 등 북한 문학에 관한 내용도 있었던 겁니다. 양씨는 "국가보안법은 사상 검증이 목적인데, (북한 내용이 적혀 있어서 ) 괜히 불안했다"며 "시집엔 제가 지리산 빨치산 비밀아지트를 답사한 내용이 담겼는데, 검찰은 시 일부를 이적표현물 증거로 제출했다"고 했습니다.  
 
"국정원 사찰 기록 충격"…간첩 낙인, 직장 내 따돌림도
 
양씨는 재판 과정에서 수사기록 열람 과정이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국정원이 양씨를 8년 가까이 사찰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양씨의 뒤를 밟으며 구체적 행적을 기록한 건 2019년 8월, 그가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뒤부터입니다. 이 기간 국정원이 양씨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영장은 없습니다. 수사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2015년부터 통신사실 등을 조회한 자료도 확인됐습니다. 역시 영장은 없었습니다. 양씨는 "2019~2021년 금속노조 부위원장 시절 국정원이 제 일정을 따라다니면서 '신출귀몰해 소재 파악이 어렵다'고 써놨더라"며 "정말 충격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양씨를 변호한 바 있는 함승용 법무법인 율립 변호사는 "영상촬영은 검증에 해당하는 강제처분이므로 반드시 사전영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정원은 수년에 걸쳐 계획적으로 (양씨를) 촬영하면서도 사전·사후영장 모두 받지 않았다"며 "이는 헌법상 영장주의를 잠탈한 위법수사의 소지가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어 "국정원이 본인을 장기간 미행하며 촬영한 것은 단순한 수사 차원을 넘어 일상의 사생활을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사실상 '평생 감시받는다'는 불안 속에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첩단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마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2023년 1월18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압수물품을 들고 나오는 옆으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정권규탄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양씨는 국가보안법 수사에 항의하며 국정원·검찰 수사와 1심 재판까지 묵비권으로 일관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2심에서 진술을 하는 걸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그러자 판결은 뒤바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석씨와 인연이 있었고 같은 정파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여행도 다녔으니 석씨와의 해외 여행도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활동 지역이 달라 석씨의 구체적인 활동은 몰랐습니다. 저는 2000년대 초 민주노총에서 통일선봉대 중앙집행위원장을 하면서 평양하고 금강산도 다녀왔습니다. 여행, 음식, 소설, 술을 좋아해서 북한 사람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끝이 없었죠. 2심 때 하노이에서 북한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말하니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간첩 사건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웃긴 거죠."
 
양씨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에게 찍힌 간첩 낙인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양씨는 앞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활동에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윤석열씨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저는) 구치소에서 영문도 모르고 당할 뻔 했다"며 "검찰 공소사실을 받아쓴 '충성 맹세' 보도로 사업장에서 같이 노조 활동하는 동지들까지 '양기창 친구들'로 묶여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분단국가에서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현실을 실감했다"며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간첩 조작 시도는 반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주=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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