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두 가지 불경(不敬)
물색 모를 때, 태국 국왕의 이름이 궁금해서 타이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상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묵묵부답.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물었으니 무지가 불경죄를 강요한 꼴이었다. 골프장에서 태국 동전을 볼마커로 쓰려고 하면 캐디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지하고는 했다. 국왕이 동전에 모셔져 있으니 땅바닥에 굴릴 수 없다는 그들의 반사신경이 작동했다. 엉뚱한 무지를 핑계로 캐디를 골탕 먹일 때 써먹는 수단이었다.
2000년 초반 라마 9세 치하의 일. 20년이 지나도 강산이 변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태국의 민심은 크게 바뀌었다. 국왕이 바뀌었으니 정상 국가보다 확실히 큰 변화다.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정치적 쟁점이었던 때보다 현재 태국에서의 불경죄 폐지 문제는 뜨겁고 예민하다.
타이인들은 왜 왕실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짜끄리 왕조가 태국이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도록 공헌한 답례라고 쉽고 흔하게 답을 한다. 정답이긴 하겠지만 내 귀에는 짜끄리 왕조에 대한 지나친 저평가로 들린다. 이런 평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짜끄리 왕조의 대나무 외교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진다.
태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를 피한 것은 반쯤은 지정학적인 이유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싸얌을 차지하기 위해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내심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이것을 간파한 독일의 중재가 작동해서 태국이 열강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면 차라리 반쯤 운이 좋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싸얌의 대나무 외교가 대단했다고 인정하더라도 태국이 식민지를 면한 것은 전혀 공짜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 영토나 지배권을 싹둑 잘라 내놓아야 했고, 불평등 조약도 뒤따랐다. 조선이 제주, 함경, 평안도를 떼어 주고 식민지를 면했다는 가정이 우리에게 성립할까? 2차 세계대전 때 타이가 일본 제국군에 몇 시간 만에 굴복하고 추축국의 일원이 되어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것은 열강이 영토를 강탈해 갔던 복수심과 '실지 회복'이라는 현실이 작동하고 있었다.
따이 문명에서 짜끄리 왕조는 특별한 존재다. 문명의 주체는 제국이다. 짜끄리 왕조는 중국 남부와 서남부에서 신세계로 이주해 따이인들이 수세기 동안 축적해온 힘을 조직하여 제국화 과정에 있었지만, 서세동점으로 저지되었다. 짜끄리 왕조 이전 타이인의 세계는 적어도 20개의 므앙인 도시국가 연합체, 만달라 체제였다.
오늘날 태국 북부 지역만 하더라도 치앙마이, 람빵, 람푼, 난, 프래(Phrae)라는 왕국과 공국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짜끄리 왕조는 이를 두 개의 지방 행정구인 '몬톤'으로 묶어 암퍼므앙, 땀본, 무반으로 계층화했다. 몬톤은 짜끄리 왕조의 내무부에서 관리했다. 이것이 대왕 칭호를 듣게 된 라마 5세 쭐라롱꼰의 주요한 공적이다.
태국사를 보면 란나, 쑤코타이, 아유타야 왕국이 시간 순서대로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병렬적이고 동시적이었다. 타이인의 첫 왕조였던 아유타야보다 늦게까지 존재했다. 짜끄리 왕조가 따이 전통을 파괴하는 것에 대항하여 지방 권력은 몇 차례 반란으로 응수했다. 이런 저항을 극복하고 짜끄리 왕조는 타이인을 '민족'으로 조직한 왕조였다. 짜끄리는 타이라는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서 분리할 수 없다.
태국의 궁예와 왕건
태국의 정복 군주 라마1세 통두왕의 초상화. (이미지=구글 Gemini)
짜끄리는 3정승처럼 작위에 대한 칭호다. 차크람을 가진 사람이란 뜻으로 인도의 신 비슈누를 상징한다. 짜끄리 왕조를 연 인물의 이름은 '통두왕'으로, 톤부리 왕조 딱씬 대왕의 장군이었다. 딱씬은 태국에서 대왕으로 꼽히는 네 명 중의 한 사람이다. 딱씬과 통두왕의 관계는 궁예와 왕건의 관계와 흡사하다. 딱씬은 아유타야가 버마에 의해 멸망하자 반격전을 펼쳐 톤부리에 왕조를 세웠다. 딱씬은 정신병에 걸려 붓다로 자처하고 '관심법'으로 포악한 정치를 했다는 명분으로 반란이 일어나 감금되었다.
통두왕은 친구이면서 짜끄리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던 딱씬 대왕을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다. 딱씬에 대한 반란과 폐위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지만 승자의 기록이 아직까진 공식적인 설이다. 짜끄리 왕조를 세운 개창자 통두왕을 라마 1세로 정하고 계위된 순서대로 숫자를 붙인 것은 라마 6세 때의 일로, 이때 성이 없던 타이인이 성씨를 갖게 되었다.
라마 1세는 뛰어난 장군 출신으로 싸얌을 인도차이나의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타이인들은 크메르 문명을 흡수하면서 성장했으나, 마침내 캄보디아를 복속시켜 종주국이 되었다. 라마 1세는 베트남에도 대해서도 응우옌 정권을 지원하면서 떠이썬 정권과 대립했다. 응우옌과 연합 함대를 결성하여 메콩 삼각주 지역에서 떠이썬과 싸웠으나 격파당했다.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 과정을 통해 응우옌 정권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라오스는 라마 1세에게 정복되어 속국으로 전락했다.
타이인에게 숙적은 강대국 버마였다. 버마에 인질로 끌려갔던 나레쑤언 같은 명군이 아유타야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버마의 속국이 되기도 했고, 결국 수도가 함락되어 멸망했다. 라마 1세는 재위 기간 버마와 일곱 차례나 전쟁을 했다. 태국의 승리였다. 라마 1세는 태국 북부 람빵 출신 까윌라를 지원하여 버마로부터 독립한 란나의 왕으로 세웠다.
라마 1세 치세 때 와서 싸얌은 역사상 최대 영역을 확보했다. 후발 주자로 들어온 타이인들이 인도차이나의 중심을 장악하고 떵떵거리게 된 역사적 사변이었다. 타이인에겐 광개토대왕 같은 자부심의 원천이다.
계몽군주 승려왕 몽꿋
27년간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한 계몽군주 라마4세 몽꿋의 초상화. (이미지=구글 Gemini)
라마 4세 몽꿋. 몽꿋은 정실의 자식이었지만 정치적 음모를 피하기 위해 스무 살에 출가했다. 27년간 승려 생활을 통해 담마윳이라는 종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몽꿋은 승려 생활을 하면서 교단의 창시자가 되었다. 타이 불교에서 민간 신앙적 요소를 거세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에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훌륭하지만, 믿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다."
47세에 왕위에 오른 몽꿋은 왕실 친척들에게 서양 교육을 받도록 촉구하고 영미 선교사들이 천문학과 지리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을 가르치도록 하면서 왕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서양 용병을 고용하여 서양식으로 군대를 훈련시켰다. 몽꿋은 영국 사절이 '우리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영국적이었다.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보링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왕립 창고가 독점하던 무역을 자유무역으로 바꾸고 수입세 3%를 한 번만 내도록 보장했다. 이 조약으로 왕실은 재정적 타격을 받았지만 평민들이 대외무역에 진출하면서 상업 부문이 급격히 팽창했다.
승려 시절에 몽꿋은 전통 점성술, 서양의 천문, 지리, 수학에 능통하여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1868년 8월18일, 동경 99도 42분, 북위 11도 39분에 있을 일식은 후아힌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서양과 자국 관리를 초청했다. 몽꿋은 지식 면에서 싸얌이 서양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개한 원주민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깨뜨리고자 했다.
몽꿋은 왕으로 환속하여 32명의 배우자로부터 39명의 아들, 43명의 딸을 두었다. 나중에 많은 후궁을 풀어주어 남편을 찾도록 했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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