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도 넘겼던 국가 R&D 예산, '사상 최초' 삭감 방침
대통령 '카르텔' 한 마디에…내년 R&D 예산 3.4조 삭감
33년 만의 삭감에 연구 현장선 "기초과학 위축" 우려
2023-08-23 16:14:09 2023-08-23 18:23:52
 
[뉴스토마토 박진아·최수빈 기자] 정부·여당이 내년도 예산안을 재정건전성은 지키되, 약자 복지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재정 곳곳에 누적된 재정 누수 요인을 대거 제거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재원을 꼭 필요한 분야에 과감히 투자하는 재정 정상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침인데요. 
 
눈에 띄는 것은 내년도 예산안 중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는 점입니다. 일반 R&D를 포함한 국가 전체 R&D 예산은 지난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삭감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와중에도 증가했던 국가 R&D 예산은 'R&D 카르텔'을 지적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구조조정에 들어간 셈입니다. 과학계를 비롯한 연구 현장에서는 경쟁력 약화는 물론, 국가 발전을 위한 기초 체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당정 "내년도 예산안, 허리띠 바짝 졸라맨다"
 
국민의힘과 기획재정부는 23일 국회에서 '2024년도 예산안 관련 당정협의회'를 열고 내년도 예산안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도 예산안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 지출 증가율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진정한 약자를 두텁게 지원하고 국민 안전과 미래 준비를 충실히 할 수 있게 편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024년은 윤석열정부 3년 차에 접어드는 해로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 대해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야 하는 시기"라며 "특히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재정 운영기조를 유지하며 미래에 대비하는 재정건전성을 확실하게 구축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정은 부모급여 지원금 인상 등 민생분야 관심사업을 대폭 확대했는데요. 노일 일자리, 기초연금, 돌봄서비스 확대와 중증 장애인 등 복지 지원도 강화했으며 저소득층 아동 등 취약계층 자립 기반 확충, 육아휴직 급여 기간 확대, 배우자 출산휴가 급여기간 확대 등의 방침에도 합의했습니다. 또 인천발 KTX,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A 조기개통 등 지역현안 해결을 위한 예산도 편성키로 했습니다.
 
23일 국회에서 열린 2024년도 예산안 관련 당정협의회에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 33년 만에 내년 국가 R&D 예산 3.4조 삭감
 
그런데 내년 국가 R&D 예산은 대폭 삭감한다는 기조입니다. 추 부총리는 "연구개발(R&D) 투자를 성과창출형, 도전형으로 전환해 국가전략기술을 확보하도록 하고 첨단산업 투자도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는데요.
 
전날 과학과실정부통신부는 이와 관련해  제4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논의된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 내년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약 3조4000억원(13.9%) 삭감한 21조5000억원으로 편성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의 R&D 예산은 과기정통부가 확정하는 주요 R&D 예산과 기재부가 구성하는 대학지원금 등의 일반 R&D로 구성됩니다. 기재부가 짜는 일반 R&D 예산이 올해와 동일한 수준(6조1300억원)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전체 R&D 예산은 전년과 비교하면 10% 이상 줄어드는데요. 현재의 안이 확정되면 일반 R&D를 포함한 국가 전체 R&D 예산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삭감 편성되는 것입니다.
 
국가 R&D 예산이 삭감된 것은 대통령의 'R&D 카르텔' 지적 영향이 컸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 갈라먹기식 R&D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사업비를 삭감 조정했는데요. 권력이 있는 연구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R&D 카르텔의 영향으로 R&D 예산이 줄줄 새고 있다는 게 윤 대통령의 지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예산을 효율화하겠다는 정부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예산 구조조정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특히 연구 현장에선 당장 내년 신규 사업은 꿈도 못 꾸고, 대형 장비 운용에 차질을 빚는 등 내년 연구사업 부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요. 중장기적으로 기초과학 연구가 위축됨은 물론, 국가 발전을 위한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카르텔'을 깨라는 주문이 예산안 대폭 삭감으로 이어지면서 연구 현장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는 모습입니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은 "국민 세금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서 효과를 높여야 하겠지만 모든 과학자들이 특정 카르텔처럼 비춰지는 지금의 상황이 아쉽다"며 "예산 삭감의 방향은 맞지만 방식은 잘못됐다. 현장과 소통하면서 (예산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지 일괄적으로 깎으면 혼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R&D 예산 삭감으로 세금 누수를 막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며 "R&D 규모, 증가율, 총액 등을 GDP 비중으로 보면 거의 최상위에 속하지만 현상 유지를 해야 개발이 가능하다. 정부가 R&D를 늘리지는 못할지언정 줄이지 않는 쪽이 더 맞았다고 본다"고 꼬집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R&D 예산 삭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야당 간사인 조승래 민주당 의원은 "윤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엄청나게 관심 많고 적극 투자할 것처럼 얘기하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6월에 거의 다 만들었던 R&D 예산을 뒤집었다"며 "연구 현장은 현재 보통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필수적인 R&D 장비 예산이 반영되지 못하면서 '연구를 하지 말라는 소리냐'까지 나온다. 예산 삭감으로 연구 인력 또한 부족하게 되면서 후속세대 양성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조 의원은 "6월 말까지 과기부 장관이 R&D 예산을 편성해서 통보하도록 돼 있는데, 6월28일 국가심의에 올리고 의결해서 편성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그런데 지금 이러한 예산 삭감은 명백한 과학기술기본법 위반으로 누군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진아·최수빈 기자 toyouja@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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