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아 기자] 정부가 레고랜드발 자금시장 경색에 분주히 대응하고 있지만 통화당국의 긴축 정책과 엇박자를 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시장의 '돈맥경화'를 풀어야 한다며 긴급 유동성 공급에 나선 가운데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으려고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린 한국은행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다.
24일 정부와 금융권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23일 단기자금시장의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50조원+α 규모로 확대하는 시장안정조치 방안을 내놨다. 이는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불이행 사태로 자금시장 경색이 심화하자 정부가 일단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급한 불' 끄기에 나선 것이다.
시장에서는 정부 조치로 일단 일시적인 시장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혜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레고랜드발 ABCP 채무불이행이 일어나면서 시장 전반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ABCP에 대한 의심이 좀 높아졌고, 그러면서 거래도 위축되고 금리가 폭등하는 모습이 나타났다"며 "이게 일반 PF나 ABCP 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들이 발행하는 기업어음(CP)으로까지 번져 단기자금시장 전반에 걸쳐서 경색이 나타났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정 연구원은 "이번 금융지원 조치들은 사실 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원책들"이라며 "시장의 유동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시장의 부담이 덜게 됐고, 중장기적으로 보면 레고랜드발 자금시장 경색 문제가 많이 완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자금시장 경색을 푸는 데 한은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회사채 시장 유동성 경색 등을 해결하기 위해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를 비롯해 회사채 매입 기구(SPV) 재가동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18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금융안정특별대출을 재가동 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한은이 금융안정특별대출 등으로 긴급 수혈을 하면 시장의 불안감은 잠시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물가를 잡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1년2개월 이상 지속하고 있는 금리 인상 기조와 엇박자가 날 수 있다. 물가 역시 아직은 5%대의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은 입장에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앞서 영국 중앙은행(BOE)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며 긴급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밖에 없었던 딜레마와 유사하다. 영국 정부는 9월 말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 국채 가격이 폭락했고 영란은행은 약 105조원 규모로 긴급 국채 매입에 나서야 했다. 물가 상승을 누르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던 영란은행이 채권시장 자금 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급하게 돈을 푸는 정책 엇박자를 펼친 것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려면 기준금리 인상과 시중 유동성 축소 기조를 이어가야 하지만, 자금 경색이 더 심각해지면 한은도 금융시장 안정성 등을 고려해 인상 폭과 속도를 조절할 수 밖에 없다. 이 같은 이유로 시장에서는 한은의 긴축 기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자금시장 경색이 더 악화하면 오는 11월 금융통화위원회의 통화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사태 후 신용시장 내 자금 경색 우려가 확대되며 A1 등급 CP 3개월물 금리와 기준금리 간 격차는 코로나19 수준까지 급등했다"며 "한은으로선 최종대부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만큼 11월에는 기준금리를 0.25%p 인상에 나서는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이 총재는 자금경색 사태가 통화정책 기조에 미칠 영향과 관련해서 "자금시장 안정 방안은 최근 ABCP 중심으로 신용 경계감이 높아진 데 대한 미시 조치라서 거시 통화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경호(가운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 금융회의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 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사진=뉴시스)
박진아 기자 toyouj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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