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금융권이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채권단자율협약을 체결하고 만기 연장, 금리 인하 등 금융지원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석화업계의 선제적인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전제 조건입니다. 채권단은 석화 생산 능력을 20% 가량 줄이기 위해선 비슷한 수준의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가 지역 경제 악영향을 최소화하라고 주문하고 있어 구조조정 작업이 지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생산설비 줄이면 감원 불가피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석화 기업들의 금융지원 원칙으로 철저한 자구 노력과 고통 분담, 신속한 실행을 강조했습니다.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이라는 구조조정 원칙을 못 박은 것입니다.
앞서 은행연합회는 지난 30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17개 은행 및 정책금융기관과 함께 '산업 구조혁신 지원을 위한 채권금융기관 자율협의회 운영협약'을 맺었습니다. 이번 협약은 석화 등 주력 산업의 선제적 사업 재편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시장과 채권 금융기관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연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시장에서 의구심을 걷어내고 의지와 실행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석화업계가 구체적인 사업 재편 그림을 조속히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습니다.
석화산업의 위기는 중국발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변수가 작용한 것입니다. 국내 주요 석화 제품 설비 가동률이 지난 2017년 93%에서 올해 80%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채권단은 국내 석화 생산능력도 20%가량 감축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문제는 석화업계의 구조조정이 결과적으로 설비 통폐합과 맞물리면서 생산직 노동자들의 감원도 불가피하다는 점입니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공급량과 생산 시설을 축소를 감안하면 20% 수준의 인력 감축안이 자구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국내 석화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서는 정부 주도의 명확한 지침이 없는 상태"라며 "연말까지 속도감 있는 구조개편을 추진하라고 강조하지만 업계 구조조정의 속도와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금융당국까지 엄포를 놓고 있지만 채권단은 심란한 표정입니다. 석화 생산 설비가 축소되면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정부는 구조개편 3대 방향 중 하나로 지역경제와 고용 영향을 최소화하라고 제시한 바 있습니다.
당장 인력 감축에 나선 기업은 전무합니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 공정한 해고 기준 등을 인정받지 못하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다는 근로기준법도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시설 통폐합 방안을 고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인력 조정은 더 난감하다"며 "노조의 반발이 예상되는 걸 무릎쓰고 먼저 나서는 곳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지방선거 앞두고 정무적 판단 우려
석화산업 구조조정에 기업 경쟁력이 아닌 정무적 판단이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방선거가 8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 특정 지역의 피해가 커지면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커질 것"이라며 "'옥석가리기'가 지연될까 우려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8월 구조개편 자율협약에 따라 석화기업과 정유사들은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폐합을 추진 중입니다. 전체 NCC 생산량의 18~25%를 줄이는 내용입니다. 울산에서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006650), 대산에서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 여수에서는
LG화학(051910)과 GS칼텍스 등이 NCC 통폐합을 논의 중입니다. 다만 석화사와 정유사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논의가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석화기업을 계속 압박할 계획입니다. 금융권에 따르면
한화솔루션(009830),
롯데케미칼(011170), HD현대케미칼 등 국내 11대 석화 기업이 은행권에서 빌린 여신 총액은 올 상반기 기준 32조8000억원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18조원이 산업은행 몫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석화 사업 재편 지원을 요청하면 돈줄을 쥔 채권단이 사업 재편 타당성을 검토해 금융지원을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기업의 신청이 들어오면 주채권은행이 자율협의회를 소집하고, 협의회는 외부 회계법인 공동 실사를 통해 사업 재편 계획 타당성을 점검합니다. 기업이 산업통상자원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가지고 가는 사업 재편 계획도 채권단과 협의를 거쳐 마련합니다.
석화 기업이 뼈를 깎는 노력을 보이면 현재 금융 조건을 유지해 만기 연장, 이자 유예, 이자율 조정 등 금융지원을 해주고, 필요 시 신규 자금도 지원합니다. 석화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채권단 약정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채권단의 구조조정 지원 절차는 중단됩니다. 구조조정 지원이 중단된다고 해도 채권단이 새로 지원한 자금에는 전액 상환 때까지 우선변제권이 붙게 됩니다.
전남 여수산업단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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