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세탁의 시스템화)①(단독)개인정보 탈취·피싱 자금, 온라인 상품권으로 빠르게 현금화
금융 인프라가 범죄 인프라로...상품권 발행사의 두 얼굴
정상거래로 '위장'한 47억... 상품권 발행 시스템의 맹점
가상계좌·API·실시간 정산... 발행사가 제공한 범죄 도구
2025-10-01 06:00:00 2025-10-01 06:00:00
[뉴스토마토 김현철 기자]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모바일 상품권. 명절 선물이나 회사 복지 포인트로 일상에 깊숙이 들어온 이 시스템이 거대한 범죄 인프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뉴스토마토> 취재에 따르면, 단 4일간 50억원이 온라인 상품권을 통해 세탁됐습니다. 발행과 환불을 반복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범죄 자금의 출처를 감췄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이 모든 과정이 정식 상품권 발행사의 시스템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과거 범죄자들이 백화점을 돌며 실물 상품권을 사고, 현금화 업자를 찾아다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상품권 발행사가 제공하는 가상계좌와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만 있으면 하루 12억원씩 세탁이 가능합니다. 비용은 10분의 1로 줄고, 속도는 10배 빨라졌습니다. <뉴스토마토>가 온라인 상품권 자금세탁의 실태를 추적합니다. <편집자 주>
 
9월 중순 단 4일. 이 짧은 시간 동안 약 50억원이 움직였습니다. 상품권을 사고팔고, 발행하고, 환불하는 과정이 수천 번 반복됐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실제로 사용된 상품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약 50억원어치의 상품권이 발행됐지만, 거의 다 환불된 겁니다. 상품권 발행 후 환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수료는 수십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가 4일 만에 약 50억원을 세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인정보 탈취와 피싱으로 시작된 범죄 자금이 온라인 상품권이라는 새로운 통로를 통해 세탁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9월30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로부터 정식 상품권 발행사로 인정받은 한 업체의 합법적 시스템을 통해 돈세탁이 이뤄지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결제대행(PG, Payment Gateway)사가 보유한 가상계좌와 결제 시스템이 범죄의 통로로 악용된 겁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상품권 발행사가 개설한 가상계좌에 가상의 이름으로 입금을 하고, 환불은 다른 사람이 받는 겁니다. 겉으로만 봐선 일반 거래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건도 가상계좌를 개설한 시중은행이 이상거래 감지하면서 시장에 알려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미지=뉴스토마토)
 
이런 방식을 쓰면 돈세탁 비용이 획기적으로 줍니다. 약 50억원이 움직이는 동안 수수료는 수십만원에 불과했습니다. 상품권 발행사가 대규모 상품권 발행·환불을 이상 거래로 신고하지 않는 등 범죄에 가담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돈세탁을 주도한 범죄 조직이 제공해야 할 수수료를 제외한다면 추가로 들어갈 비용은 없습니다. 
 
온라인 상품권이라는 새로운 '돈세탁 통로'의 등장
 
과거에도 상품권을 활용해 돈세탁하는 방법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조직 입장에선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보이스피싱이나 투자 사기로 받은 돈으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실물 상품권을 구매해야 했고, 한 번에 살 수 있는 상품권의 수량도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곳에서 대량으로 상품권을 사면 의심을 받았습니다. 결국 여러 지점을 돌아다니는 발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하루 수억 원을 벌기는 했지만, 수고도 컸던 겁니다. 
 
구매한 상품권을 현금화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제3자를 활용해 상품권 매입업자를 찾아다녀야 했으며, 매입업자에게는 실물을 직접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폐쇄회로TV(CCTV)에 찍힐 경우 수사기관에 꼬리를 밟히는 게 부지기수였습니다. 중간 상인들에게 지불하는 수수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상품권 구매 대행 수수료 5%, 현금화 수수료 10~15%, 운반책 비용까지 합치면 전체 금액의 20~30%가 비용으로 지출됩니다. 무엇보다 속도가 문제였습니다. 100억원어치 상품권을 매매하려면 수십 명이 몇 주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대부분은 적발됐습니다. 올해 1월 서울 구로경찰서가 검거한 사건만 봐도 그렇습니다. 범죄 조직이 2388억원을 세탁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2023년 1월부터 2024년 3월까지 15개월이었습니다. 투자리딩 사기와 사이버 도박 수익금을 상품권 거래로 위장해 세탁했는 데 1회 최대 처리 금액은 3억원이 한계였습니다. 
 
2025년 1월13일 오전 서울 구로구 서울구로경찰서에서 김성훈 서울구로경찰서 수사1과 과장이 '범죄 수익금 2388억원을 세탁한 상품권 업체 운영자 검거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하지만 온라인 상품권을 이용한 돈세탁은 다릅니다. 특히 상품권 발행사 시스템을 활용하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자금세탁이 가능합니다. 일단 방식이 간단합니다. 상품권 발행사가 개설한 가상계좌에 가상의 이름으로 입금을 하고, 환불은 다른 사람이 받으면 언뜻 봐선 일반 거래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속도도 압도적입니다. 4일간 약 50억원이 움직였습니다.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어듭니다. 상품권 발행사의 합법적 시스템을 활용하면 들이는 시간은 줄고, 세탁하는 액수는 크게 늘어나는 겁니다. 이에 돈세탁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과거 오프라인 현금화 방식이 손빨래였다면, 지금 방식은 통돌이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품권 발행사 시스템 '사각지대'…부실한 관리·감독 
 
이번 사건의 핵심은 상품권 발행사의 역할입니다. 상품권 구매를 위한 가상계좌 개설, 발행·환불 처리 시스템은 모두 상품권 발행사가 제공 및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상품권 발행사는 가맹점을 엄격히 심사합니다. 특히 상품권처럼 현금화가 쉬운 업종은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더욱 특별하게 관리합니다. 하지만 이번 돈세탁 사건을 통해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입니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되면서 상품권 발행과 유통에 대한 규제가 사라졌습니다. 상품권 발행사는 전자금융거래법의 적용을 받지만, 상품권 거래 자체를 규제할 근거는 없습니다. 개인은 10만원까지만 상품권을 구매 가능하지만, 사업자에겐 제한이 없습니다. 상품권 발행사 입장에서는 사업자 거래를 막을 이유가 없는 셈입니다. 오히려 대량 거래를 환영하는 실정입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의심거래보고(STR) 대상이지만, 기준도 모호합니다. 1000만원 이상은 고액거래보고(CTR) 대상인데, 이를 1000만원 이하로 쪼개면 그만입니다. 
 
무엇보다 상품권 발행사에 대한 직접적 관리·감독이 부실합니다. 피해자의 신고나 자체 보고 시스템에 의존하는 점검 방식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상품권 발행사가 범죄 자금 세탁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구조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이 같은 방식을 활용한 돈세탁은 아직 시장의 풍문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며 “온라인 상품권 운영에 대한 세밀한 점검과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현철 기자 scoop_pres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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