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희 기자] #. 직장인 A씨는 최근 집을 사기 위해 시중은행에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상담을 받았습니다. 주민등록등본과 초본부터 건보료자격득실확인서, 배우자 서류까지 합쳐 모두 17가지, 30장에 달하는 서류를 제출하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최근 대출 규제 강화로 비대면 창구가 일부 막히면서 시중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내야 할 서류만 수십장에 이르는 등 불편이 커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원래 기존 은행에서 떼서 확인했던 서류들도 직접 발급해 제출하라고 하는 상황이라 소비자들의 번거로움이 커졌습니다. 특히 은행들이 그동안 저탄소와 환경 보호를 위해 실천하던 종이 서류를 없애는 이른바 '페이퍼리스'와도 역행하는 행태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무더기 자료 제출 요구
9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에서 대출 받으려면 가족관계증명서와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초본(전 주소 포함), 전입세대열람내역, 재직증명서, 원천징수영수증, 건보료자격득실확인서, 신분증 사본, 인감도장, 매매계약서사본, 매도계약서사본, 매수매도계약금 입금거래내역서 등을 제출해야 합니다. 여기에 공동 명의일 경우 배우자 서류로 주민등록등본과 초본, 인감, 인감도장, 신분증 사본도 추가로 제출해야 합니다.
은행들은 7월부터 시행하는 스트레스 DSR(총부채상환비율) 3단계 규제와 6.27 부동산대책에 따라 자체적으로 뗼 수 있는 서류도 요청하는 등 꼼꼼히 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스트레스DSR 제도는 변동금리 대출 등을 이용하는 차주가 금리 상승으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상승할 가능성을 고려해 DSR 산정 시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가산) 금리를 부과하는 규제입니다. 해당 규제 적용에 따라 은행과 제2금융권의 주담대, 신용대출, 기타대출에 1.50%의 가산금리가 부과됩니다.
예를 들어 연 소득이 5000만원인 수도권 차주의 경우 대출 한도가 변동형, 30년 만기, 원리금균등상환, 대출금리 4.2%를 기준으로 기존 3억원에서 2억9000만원으로 약 3%가량 줄어듭니다. 연 소득 1억원일 경우에는 같은 조건의 대출 한도가 5억9000만원에서 5억7000만원으로 감소합니다. 이처럼 소득에 따라 적용받는 대출 한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꼼꼼한 소득 증빙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최근 금융위원회가 강도 높은 대출 규제를 발표해 은행들이 금리 인상 등 대출 문턱을 높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금융위원회는 6·27 부동산 대책을 통해 올 하반기 가계대출 증가 폭을 10조원가량 억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각 은행에 기존보다 대폭 낮춘 총량 목표치를 제시했고, 은행들도 금리 인상, 대출 한도 축소, 모집인 영업 중단 등의 방식으로 대출 문턱을 높이고 있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재직증명서나 건보료 등 서류들은 굳이 제출하는 서류긴 하지만 DSR 규제 때문에 소득을 확인할 추가 증빙 자료가 필요해서 그런 것 같다"면서 "재직 확인은 서류 하나면 확인할 수 있긴 한데 DSR 규제 때문에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등 구체적인 서류가 필요할 텐데 그게 대출을 취급하는 은행과 담당자마다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새 정부 이후 발표한 대출 규제에 따라 서류를 깐깐하게 볼 수밖에 없다"며 "현재 대출 창구라도 줄이기 위해서 비대면 주담대를 모든 시중은행이 중단한 상황인데 대출 서류가 접수되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최대한 대출 접수를 막기 위해 비대면을 중단하고 대면으로 접수하는 것도 정부 규제에 맞춰 최대한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멀어지는 탄소 제로
디지털 전환 가속화와 환경 보호를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은행 내 종이 서류를 전자서식으로 대체해왔던 은행들의 행보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동안 은행들은 비용 절감과 ESG 경영 실천을 내걸고 종이 서류를 없애고 전자창구 시스템을 도입하는 '페이퍼리스' 전환을 추진해왔는데요. 종이 사용량 감소로 인해 목재 소비를 줄이고, 종이 생산 및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취지였습니다.
실제로 NH농협은행은 지난 2014년 금융권 최초로 전자창구 시스템을 도입하며 영업점 '페이퍼리스' 전환을 추진한 바 있습니다. 뒤이어 국민은행이 2017년부터 전자창구 시범 운영을 시작했으며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우리은행도 2018년부터 페이퍼리스 전환에 동참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규제로 인해 대출을 접수하며 서류를 수십장을 제출해야 하는 모습은 환경 보호에도 어긋날뿐더러 금융 소외계층을 더욱 외면하는 것이라며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규제에 따라 금리는 계속 오르고 대출 요건은 까다로워졌으며, 특히 비대면 대출이 차단되면서 되레 대면 대출 심사 기준이 깐깐해졌다는 지적인데요. 이로 인해 청년과 신혼부부 등 갑작스럽게 돈을 빌려야 하는 서민층은 대출을 받기 어렵게 됐고 금융 소외계층이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는 그동안 서류 간소화와 비대면 금융 확대를 통해 금융 접근성을 높이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규제 강화로 인해 은행들이 오히려 더 많은 서류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는 명백히 우리 사회가 추진해온 디지털 전환, 즉 '페이퍼리스' 방향성과 상반되는 흐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규제는 필요하지만, 실수요자와 투기 수요를 구분하고 디지털 환경에 맞는 정밀한 정책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일괄적 규제로 접근하면 금융 불균형만 심화되고 서민 경제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시중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서류만 수십장 내는 등 문턱이 깐깐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원래 기존 은행에서 떼서 확인했던 서류들도 직접 발급해 제출하라고 하는 상황이라 은행 소비자들의 번거로움이 커진 것이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대출 창구에서 은행 직원이 일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재희 기자 nowhe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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