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외교문서 공개…IAEA와 주한미군 핵사찰 딜 요구한 북한
북핵 놓고 한미-북 '사찰' 기싸움…'모가디슈' 실화 뒷얘기도
조지 부시 방한 전 미국 "남북관계, 한미안보 영향 줘선 안돼"
2023-04-06 15:52:16 2023-04-06 17:23:12
조선중앙TV는 "중부전선의 중요 화력타격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미싸일부대에서 3월 27일 관하 구분대들을 중요 화력타격 임무 수행 절차와 공정에 숙련시키기 위한 시범교육사격 훈련을 진행하였다"고 지난달 28일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윤혜원 기자]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한 이듬해이자 북핵 문제가 국제사회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1992년의 외교 비사가 처음 공개됐습니다. 외교부가 6일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361권, 36만여 쪽을 외부에 밝힌 건데요.
 
이를 통해 과거에 북한이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주한미군기지 사찰을 요구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미국, 중국, 일본 방문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옐친 러시아 대통령,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 찰스 영국 왕세자의 한국 방문 등 정상 간 교류의 막전막후도 이번 공개에 포함됐습니다.
 
①북 “영변 핵시설·남한 미군기지 사찰 맞바꾸자” 
 
소련 해체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무렵, 외교적 고립 위기에 처한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후 6년여 만인 1992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핵 사찰을 받아들였죠. 
 
이날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1991년 12월 북한을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 당시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에 북한 측은 핵 개발을 두고 남한 측이 제안한 동시 시범사찰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북한은 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과 북한의 남한 미군 기지 사찰을 맞바꾸자고 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정전 직후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 핵포탄과 핵순항미사일 등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습니다. 다만 1970년대부터는 우발적 핵전쟁에 대한 우려로 전술핵 규모를 줄였고 1991년에 이르러 한국 내 핵무기를 완전히 철수했죠. 이에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핵무기 부재’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줄곧 주한미군에 대한 핵사찰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김영남 당시 북한 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을 위해 뉴욕을 방문해 “IAEA 사찰을 통해 우리 핵의혹은 해소되고 있는 반면 상호 사찰이 실시되지 않아 남한 내 미군기지에 대한 핵의혹이 상존한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②노태우 전 대통령 방일‘개별 현안’ 언급 자제 
 
한국을 둘러싸고 각국 정상의 만남이 이뤄지기 전 물밑에서 벌어진 일들도 이번 공개에 담겼습니다. 1992년 11월 노 전 대통령은 일본에 실무방문 형태로 당일 방문했습니다. 한국 측이 중점 사항으로 뒀던 대목은 ‘동반자적 한일 협력 관계 구축’이었는데요. 
 
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이 정상회담 의제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은 한일관계를 의제에 넣되, 개별 현안에 대한 논의는 피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한국 측은 위안부 문제 등 현안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간단히 거론하는 방향이 될 거라고 일본 측에 전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방한이 취소된 정황도 공개됐습니다. 1992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경향신문의 공동 초청으로 방한해 판문점 시찰을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출두하는 문제로 해외여행 금지 조치를 받아 방한이 무산됐습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서는 한미 간에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 대한 우려 섞인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1990년 10월께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주미대사관 공사에 “남북관계 진전을 이유로 한미안보 및 협력 체제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 “주한미군은 독일의 경우처럼 통일된 후에도 수행할 중요한 임무가 있을 것” 등을 언급했습니다.
 
③태극기 흔든 북 외교관‘모가디슈’ 생생 실화
 
영화 ‘모가디슈’로 유명해진 1991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사건과 관련한 외교전문도 이번 공개 대상에 올랐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 12월 30일 당시 소말리아 반정부군이 내전으로 모가디슈에 진격하자 소말리아 주재 남북한 대사관원이 공동으로 대피했던 일입니다.
 
문서에는 남북한 대사관원들의 긴박한 탈출 과정이 묘사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외교관임을 증명해야 했고, 이에 북한 측 이창일 서기관은 이동 내내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운전을 맡았던 북한인 한상렬씨는 숨지는 순간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는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했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사건 이후 한국 정부는 강신성 주소말리아 대사의 귀국 기자회견을 앞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되, 북한 공관원들의 입장을 어렵게 하거나 북한을 자극하는 등 남북 대화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적절한 처신을 지시했습니다.
 
윤혜원 기자 hwyo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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