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오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4박6일 일정으로 동남아 순방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밝힌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이 미국 기조를 답습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11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발표한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에는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 확립', '개방적이고 공정한 경제질서' 등이 담겼다.
윤 대통령은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 확립'과 관련해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은 결코 용인되어선 안 된다"며 "규칙에 기반해 분쟁과 무력 충돌을 방지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이 지켜지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은 미국이 중국의 확장을 견제할 때 자주 쓰는 표현으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양안(중국·대만) 갈등을 비롯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윤 대통령은 '개방적이고 공정한 경제질서'와 관련해선 "공급망의 회복력을 높임으로써 경제안보를 강화하고 협력적·포용적인 경제기술 생태계를 조성해 공동 번영을 달성해 나가고자 한다"고 했다. 이를 두고 역내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인태 전략에 한국이 공동보조를 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13일(현지시간) 프놈펜에서 개최한 한미일 정상회의 첫 공동성명에서도 "불법적인 해양 권익 주장과 매립지역의 군사화, 강압적 활동을 통한 것을 포함하여 인도·태평양 수역에서의 그 어떤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중국을 직접 명시하지 않았지만 남중국해 문제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한국판 인태 전략에 대해 "확실한 미국 편이라고 공식 선언한 셈"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14일 한 라디오에서 "인도·태평양을 묶어 대륙을 견제하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일본)아베 수상 시절 '자유의 호'에서 나왔던 전략을 트럼프가 인태 전략으로 만들었고, 바이든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며 "그것이 한국의 외교전략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인태 전략은 해양 세력끼리 뭉쳐 대륙, 즉 중국과 북한, 러시아가 없다"며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지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국가를 다 배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가 아세안과 사이가 굉장히 좋기 때문에, 미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아세안 국가들을 설득시키는 임무를 받은, 심하게 말하면 돌격대가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이날 한 라디오에서 "윤 대통령으로서는 이번에 바이든하고 만나서도 인도·태평양 전략이 상당히 깊숙이 들어갔다. 인도·태평양에 관계되는 것은 중국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며 "특히 인태 전략 문제에 대해서 외교를 잘하셔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도 윤 대통령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미국의 전략과 보폭을 맞추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12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프놈펜 현지에서 대통령 순방 출장기자단 브리핑을 갖고 '한국판 인태 전략은 미국과 보폭을 맞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질문에 "맞기도 하고 틀린 측면도 있다"며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기대 수준에 부응하는 측면도, 아닌 면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아세안은 미중 간 치열한 전략경쟁의 전쟁터"라며 "주요 강대국 간 전략경쟁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상주의적인 이익만 좇을 경우 오히려 미묘한 변화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수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언급한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은 결코 용인되어선 안 된다'는 표현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과 관련해선 "특정 국가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일반론적인 발언"이라며 "미국, 중국, 일본이 됐건 간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차원, 리스크 분산 노력이 우리나라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는 일반론적인 언급"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의 두 번째 순방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중국과의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은 오는 15일 G20 정상회의에서 식량·에너지·안보와 보건 세션 연설에 나선다. 이 자리에는 최근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참석해, 첫 대면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윤 대통령이 한국판 인태 전략과 한미일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중국 견제에 사실상 보폭을 맞추면서 중국 측이 우회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윤 대통령은 두 번째 순방지인 인도네시아 도착 첫날인 14일(현지시간) 현지 진출기업 오찬간담회를 비롯해 B20 기조연설, 한·인니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등 경제 외교 일정을 소화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주요20개국(G20) 회원국 경제단체와 기업 대표들이 참여하는 'B20 서밋'(Summit)에 참석,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민간 주도 성장'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디지털 전환"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디지털 생태계는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누구나 디지털 데이터에 공정하게 접근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국경을 초월하여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디지털 시대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도록 B20을 중심으로 인류가 공감하는 디지털 질서를 정립해 나가길 기대한다"고 했다.
G20 정상회의는 17일까지 열리지만, 윤 대통령은 15일 심야 귀국길에 오른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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