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선율 기자] "주 69시간까지 근무시간이 확대된다면 사람을 갈아서 결과물을 만드는 개발도상국때로 돌아가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 A중소업체 IT 개발자
정부가 한주 최대 가능한 근로시간을 기존 52시간에서 69시간까지 확대하는 근무제 개편 추진을 예고한 가운데 IT업계 노동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포괄임금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공짜야근 문화가 관행처럼 이어오고 있는데, 이 제도 시행으로 오히려 우수 인재들이 이탈하거나 지원을 기피해 인력난이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미래노동시장 연구회 전문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고용노동부)
19일 업계에 따르면 윤석열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마련해온 전문가 논의기구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는 현행 '주 단위'인 연장근로시간을 '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개편하는 방안을 정부에 최종 권고했다. 현행 주52시간제로 대표되는 현행 근로시간은 법정근로시간 1주 40시간에 연장근로시간 1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연장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 경우 주 최대 69시간 근로도 가능해진다. 정부는 연구회의 권고를 바탕으로 내년 입법에 나서는 등 이른바 노동개혁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IT업계 근로자들은 근무허용시간이 늘어나면 과거 문제를 일으켰던 '크런치모드'가 부활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이나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해 장시간 고강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 게임사에 다니는 5년차 게임 개발자 김준수(가명)씨는 "게임 개발, 디자인 분야에선 마감 압박에 시달리는 크런치모드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면서 "우리와 같은 중소업체들의 경우 포괄임금제 폐지도 돼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공짜 야근은 당연하게 강요되고 있고 이걸 못버티는 신입들은 진작에 나가서 일손마저 부족해 업무과다 상태에 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IT스타트업 디자이너 임정현씨(가명)는 "시간을 늘리면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근거를 들던데 그건 90년대나 통했던 얘기고 우리 같이 창의성을 요하는 개발업무는 사람이 건강해야 일의 능률도 오른다"며 "사람 먼저 존중하는 노동환경을 구축해야하는데 그려러면 포괄임금제 폐지부터 의무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이용자가 메타버스 관련 게임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지난해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연평균 실제 근로시간은 1915시간으로 38개 회원국 중 5위를 기록했다. 이는 OECD회원국의 평균 근로시간인 1716시간보다 199시간이나 높은 수치다. 또한 한국 노동자는 1349시간 일하는 독일의 노동자에 비하면 566시간이나 더 일하고 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IT위원회는 주 52시간제 유연화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노조는 OECD 기록상으로도 이미 초 장시간 일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가 수당 지급 의무가 없는 포괄임금제로 인해 노동 시간을 제대로 측정하지 않는 수많은 사업장들의 숨은 노동시간이 OEDC 수치엔 제외돼 있다는 것이다.
지난 15일 화섬식품노조는 공식 입장문을 내고 "IT업계 크런치 모드로 인한 과로사 등 비극적인 일을 해결하고자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됐고 이후 노동시간 감축 효과가 있었다"라며 "이번 권고안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장시간 노동을 몰아서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다는 시각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닌 만큼 잠을 몰아서 잘 수 없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포괄임금제를 유지하는 사업장에선 여전히 장시간 노동이 이뤄지고 있기에 포괄임금제부터 폐지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포괄임금제 폐지 없이 초과 근로를 특정 기간에 몰아서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크런치 모드를 전 산업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라며 "노동시간을 줄여가던 흐름을 중단시키고 또 다시 대한민국을 초 과로 사회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크런치 모드의 전 산업 확대 시도를 중단하고 포괄임금제 부터 폐지해 장시간 노동 문제를 근절하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시간 유연화를 섣부르게 도입하기보다는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비교해 효율성을 따지면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해 OECD 조사에서 한국은 평균 대비 장시간 노동을 한 나라로 나타났는데, OECD 평균 정도로 줄이고 나서 유연화를 해도 늦지 않다"면서 "이미 현재도 장시간 노동이 이뤄지고 있는데 69시간까지 근무를 허용하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장시간 노동이 상시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비정규직, 영세 사업장 등을 중심으로 근로시간뿐 아니라 근로기준법도 안지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면서 "특히 IT업종의 경우 프로젝트를 이행할 때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아 과로사 등 사회적 문제가 나타난 바 있다. 이번 안건은 기업 측 요구에만 초점이 맞춰져 현재 노동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이선율 기자 melod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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