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 계기로 예상되는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놓고 우리 정부와 일본 측이 혼선을 빚고 있다. 예정대로 정상회담이 개최돼도, 한일 관계 개선 의지만 노출시킨 끝에 주도권을 일본에 내줬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롭기 어렵게 됐다. 자연스레 과거사 문제도 언급이 어려워졌다.
성사된다면 2019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와 양자회담을 한 지 2년10개월 만의 한일 정상회담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유엔총회에서 한미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해놓고 시간을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진행하는 회담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의제에 대해서는 "서로 알고 있는 우려 사항도 있고, 이미 확인했던 의제도 있기 때문에 실무 차원에서 관계 부처들이 발전시켜 온 이행 방안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 곧바로 "총리 뉴욕 방문의 구체적인 일정은 현 시점에서는 전혀 결정되지 않았다"며 "기시다 총리는 제반 사정이 허락하면 유엔총회에 출석하는 방향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유엔총회 참석조차 확정짓지 않았다. 다분히 온도 차가 묻어났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 부분은 어제 안보실 관계자가 충분히 설명했다"고 말을 아꼈다. 대통령실 내부적으로는 국가안보실 중심으로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분석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일본 언론은 한일 정상이 만나더라도 단시간에 그칠 것으로 관측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에 "합의 사실이 없다", "들은 바 없다. 왜 그런 발표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일본 외무성 간부 등의 발언을 인용하며 정부 측이 곤혹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일본 정부는) 옛 징용공(강제노역 피해자) 소송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한국 측의 대응이 보이지 않아 정상회담을 개최할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인식"이라며 "양국 정상이 만나더라도 단시간 접촉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결국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의 신경전으로 해석됐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듭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고 있어, 일본이 강제 징용 등 과거사 문제에 있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됐다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일본은 자국 기업의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 문제를 놓고 줄곧 '한국이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일방적 태도를 취했으며, 이는 한일 관계 걸림돌로 지적됐다.
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앞서 윤 대통령은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며 관계 전환을 모색했다. 또 "한일 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며 "한일 관계의 포괄적 미래상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해 한일 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가 1998년 10월 서명한 '한일 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에 기초한다. 오부치 전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에 사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전 총리의 역사 인식을 높게 평가하고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양국이 서로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반면 윤 대통령의 경우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일본의 반성과 인식이 결여됐다.
때문에 유엔총회를 계기로 한일 정상이 얼굴을 마주한다 해도 과거사 등 현안에 대한 언급은 없을 전망이다. 앞서 윤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양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과 AP4(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정상회담 등에 참석했으나, 따로 양자 회담은 갖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참의원 선거를 앞둔 터라 한국 정상과 별도로 회동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결국 일본 사정에 우리가 휘둘리는 모양새가 되고 만 것.
남북 관계도 진전 대신 대결 구도만 확연해질 공산이 크다.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제안했던 '담대한 구상'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은 없다는 게 대통령실 설명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은 데다, 북한은 '담대한 망상'이라고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 등 제안 자체를 일축했다. 북한은 담대한 구상을 "동족 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이명박정부의)비핵·개방 3000 복사판에 불과하다"며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전제"라고 쏘아붙였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전날 "이번 총회에서 담대한 구상을 다시 요약해 연설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이번 연설에서는 핵 위협, 대량살상무기 위협 속에서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동맹인 미국과 자유를 중시하는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한반도를 지키고 핵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해 나간다는 함축적 메시지가 담기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결국 담대한 구상을 뒤로 물리고, 북한 비핵화를 목적으로 국제사회와의 압박에 주력할 것이란 관측이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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