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신사 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악!"
지난 27일 오후 2시 서울 연남동 채널1969 앞.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목청이 지상까지 수직으로 타고 올라왔다. 지글대며 튠을 맞춰보는 전자기타 소리는 덤. 땀이 빗줄기처럼 낙하하는 날씨였지만, 그 부글거리는 힘에 끌려 내려갔다. 올해로 데뷔 24년차 관록의 밴드가 손만 대면 터질 화약고처럼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린/ 매직 서커스 유랑다안~' "어서들 어서들 오세요, 연남에!"
밴드 크라잉넛이 문을 연 '어서오세요, 연남에 뮤직페스타'. 통상 신인들을 첫 무대에 올리는 다른 행사들과는 달리, 이 축제는 파격과 도전을 택한 듯 했다. 꿀 같은 늦잠에 취할 토요일 대낮부터, 이들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술을 쫙쫙 마시고, 낭만에 취하고, 밤이 깊을 때' 들어야 제맛이라는 그들 음악이 아닌가. 하지만 이날 크라잉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술을 쫙쫙 마시고, 낭만에 흠뻑젖고, 밤 만큼 짙은 지하에서 무대를 휘저어놨다.
객석으로 돌진할 듯 달려들어 연주하는 한경록(베이스)과 머리엔 두건을 어깨엔 전자기타를 메고 날아갈 것처럼 점프하는 박윤식(보컬·기타), 선글라스를 쓰고 시크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다 마이크를 입에 넣고 메탈리카 '엔터샌드 맨(Enter Sandman)'을 포효하는 김인수(이코디언·키보드), 강렬히 찍어내리는 북과 심벌로 모든 사운드를 든든히 받쳐주는 이상혁(드럼). 이날 이상면이 없어 강력한 투 기타 사운드를 못 듣는 것은 아쉬웠으나, 그들은 역시 즉흥과 날 것, 잘 짜여진 완성도 사이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를 하며 ‘록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줬다.
밴드 크라잉넛.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첫 단추를 잘 끼우겠다”는 게 무대 위에서 던진 그들의 바람이었다. 나머지 단추들은 한·일의 재기발랄한 다른 밴드들이 멋지게 채워나갔다. 드럼과 어쿠스틱 만으로 물샐 틈 없는 박자를 만들고, 그 위를 오로라빛 같은 멜로디로 유려하게 거닌 레이브릭스에 이어 소년핑크는 코 끝 시린 청춘의 먹먹한 언어들을 나직히 읊조렸다.
80년대 신스팝과 90년대 힙합, 2000년대 시부야케이 뮤직을 한 데 뒤섞었다는 별보라는 그들의 이름에 걸맞게, 즉시 다른 세상의 별로 관객들을 데려다 줄 것처럼 연주했다. 기타를 벗고 막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고, 때론 무대 위에 아예 드러누웠다. 이것이 이 세기의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불살랐다. 츠시마미레와 매스 오브 더 퍼멘팅 드렉스 같은 일본 밴드의 무대까지, 낮에 시작한 축제는 밤까지 이어졌다.
낯설고 기괴하고 때론 거칠고 투박했던 이날 축제. 그래서 더 진하고 깊게 무대 하나하나는 인장처럼 아로 새겨졌다. 실제로 이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 중엔 영어권에서 온 외국인 비중이 40% 남짓 될 정도로 많아 보였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네추럴한 느낌이 있어 색다르고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두 달여 간 한국 여행 중 이 곳을 찾았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에바 엠마씨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고 미칠 듯이 무대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며 “흔히 케이팝 하면 잘 짜여지고 연습된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특히 크라잉넛을 보고 그런 편견이 깨졌다”고 말했다. 호주 멜버른에서 왔다는 나스타시아 스태스씨는 크라잉넛의 김인수를 가르키며 “이 분 때문에 오늘 공연은 ‘크레이지(Crazy)’ 였던 것 같다”며 “한국 밴드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졌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꼭 추천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관객들과 사진 찍는 크라잉넛 멤버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 기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2019 인디음악 생태계 활성화 사업: 서울라이브' 공연 평가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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