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영 정경부 기자
지난 1993년 출간된 장편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저)를 읽은 기억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한국의 핵실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일어난 천재 물리학자의 의문사와 이를 추적해가는 한 베테랑 사건기자, 남북 핵합작을 위한 안기부장의 방북, 청와대 경내에 오랜 기간 숨겨져있던 코끼리 속 플루토늄…그 중에서도 명장면은 일본 자위대의 공격을 받은 직후 우리 군이 발사한 핵미사일이 도쿄 남방 100km의 무인도 미쿠라지마에 명중했을 때였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통쾌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핵무기 보유 문제는 박정희정부 이래로 우리 군의 숙원인 ‘자주국방’과 묘하게 얽히며, 국방분야에 관심있는 남성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핵무기는 ‘최고의 비대칭 전력’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으며 주요 강대국들의 힘의 원천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대응 차원에서 보수야당이 주장 중인 자체 핵무장·전술핵 재배치 주장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도 핵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옳은 일일까. 외교안보 문제에 희망사항이 개입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객관적 상황인식에 기초한 전략 수립이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 점에서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의 지난 19일 당 원내대책회의 공개발언은 와닿는다. '전술핵·자체 핵무장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북한 핵을 인정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탈퇴를 의미한다. 우리가 국제사회 동의 없이 독자적 핵무장을 해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모두 태울 수 있다는 말이다.
홍 의원의 발언은 이어진다. '(미국의) 강력한 전략 핵우산이 전술핵보다 북핵으로부터 열배·스무배 안보를 지켜주고 있기에 전술핵의 효용가치는 없다. 냉전체제 해체 후 전술핵의 효용가치는 상당부분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전술핵이나 핵무장 이야기는 그야말로 핵전쟁 상존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국지전에서 서로 간에 핵폭탄이 날아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전략도 우리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현저히 낮춘다. 미국은 러시아·중국 등을 의식한 세계전략을 기준으로 북핵문제에 접근한다. 우리가 원한다고 핵 개발을 용인해주거나 전술핵을 배치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방미특사단을 꾸려 요청한다고 해도 이같은 입장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를 둘러싼 외교안보 상황을 직시하고 전술핵·핵무장 문제에 접근하자. 1905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됐음에도 그로부터 23년 전 조미수호통상조약만 믿고 막연히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던 고종의 무지를 반복할 만큼 우리 사정이 한가하지 않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최한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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