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 "우리가 전면에 나설 일이 없는 게 금융시장에는 좋은 일 아니냐"
예금보험공사 직원들이 종종 입에 올리는 말이다. 예보가 두팔을 걷어붙이는 '비상사태'가 발생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부실금융기관 속출, 공적자금 투입, 대규모 청산사태 등등. 10여년 전 유행했던 이 살떨리는 말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예보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예보 역할론'을 떠나 또 다시 금융시장이 망가져선 안 된다는 진정성과 절박함이 배어있는 말이다.
◇ 공적자금의 다른 이름 `예보`
사실 금융시장도 '예금보험공사'라는 이름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외환위기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에게 예보는 사실상 공적자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공적자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생각은 10여년 전으로 달음박질친다. 조직의 실제 역할이 어떻든 일단 예보가 '뜨면' 시장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예보를 사태수습 차원에서 등장하는 '장의사'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예보는 수많은 예금주들의 버팀목이다. 예금보험제도 대한 신뢰는 지난해 저축은행들의 고금리 예금유치 경쟁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저축은행들은 최대 연 9%를 넘나드는 고금리를 제시하며 예금주들을 끌어모았다. 예금보호제도의 안전망 앞에 '저축은행'이라는 브랜드에서 오는 불안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민들은 5000만원 범위 안에서 안심하고 돈을 맡겼다. 고금리 혜택은 고스란히 예금주들에게 돌아갔다.
◇ 변신 가속화
예보의 안전망은 점차 외연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외화예금이 예금보호대상에 포함됐다. 또 지난달에는 퇴직연금 적립금도 예금보험제도의 품에 들어왔다. 예보 관계자는 "예금보험제도는 공기와 같다"며 "예보가 위기상황에서 등장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 예금자를 보호하고 금융기관의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시스템 선진화를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목표기금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저축은행을 제외한 상당수 금융권의 보험료율이 낮아졌다. 오는 2014년부터는 개별 금융회사가 떠안고 있는 리스크를 바탕으로 보험료를 부과하는 차등보험료율제가 전면 도입된다.
예금보험료 납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덜어주고, 리스크에 상응하는 합리적인 보험료를 책정하기 위한 조치다. 이와 함께 금융회사의 부실징후를 조기에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감시모형을 개발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예보의 예금보호제도와 리스크관리 시스템은 언제나 변함 없이 가동되고 있다. 평소에는 숨을 죽이다가 위기상황에서만 등장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얘기다.
◇ 이승우號 본격 가동
예보를 '경계(?)'하는 시장의 정서를 두고 직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다 친시장적인 조직으로 거듭나려면 이미지 전환이 시급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예보측도 공감하고 있다.
지난 5월말 취임한 이승우 예보 사장은 "'환부작신(換腐作新)'의 정신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썩은 것을 바꿔 새 것을 만들자는 의미다. 부실금융기관 정리와 청산업무까지 맡고 있는 조직특성과도 맞아떨어지는 말이지만, 새로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활기찬 조직으로 거듭나자는 뜻도 담겨 있다.
그는 또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시각으로 앞을 내다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가 필요하다"며 "금융시장의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자"고 강조했다. 오랜 관료생활을 거친 그는 예보 사장 자리를 마지막 공직 생활이라고 보고 조직역량 강화를 위해 뛰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승우호(號)'로 변신한 예보가 '장의사'의 옷을 벗고 '파수꾼'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 새로운 정체성 확보에 고민해 온 예보가 새 지휘관을 만나 얼마나 변신에 성공할 수 있을지 시장은 주목하고 있다.
취임 이후 현황파악에 주력해온 이 사장은 조만간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할 예정이다.
뉴스토마토 박성원 기자 want@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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