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시민모임 독립 답사단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시민모임 독립' 제공)
6월29일부터 7월3일까지 4박5일 동안 '시민모임 독립'이라는 단체가 조직한 중국 화동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를 답사했습니다. 모두 32명이 참여했는데요. 그 가운데 10명은 20~30대였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독립운동 역사를 알리자는 뜻에서 이 단체가 선발해 참가비를 전액 지원했죠.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의 외손자인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특히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시작해 1945년 광복 때까지 26년 동안 중국 관내 곳곳을 전전하며 투쟁을 이어갔죠. 이번 답사에서는 전반부 1919~1937년에 활동했던 상하이와 항저우, 난징 등 중국 화동 지역의 발자취를 찾았습니다.
상하이에서는 황포구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와 훙커우 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 시설,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주택가인 영경방, 한인 자녀를 교육한 인성학교 터, 윤봉길 의거를 마지막으로 협의했던 중국기독교청년회관, 세상을 뜬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묻혔던 만인공묘 등을 방문했습니다. 임시정부 청사에는 김구 주석 집무실과 침실 등을 복원했고 임시정부 활동 자료를 전시해놓았습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죠.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폭탄 의거를 결행하자 프랑스 조계 당국은 임시정부를 보호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난 가득한 도피 여정을 시작합니다. 김구는 중국인 실력자한테 도움을 받아 저장성 자징시 2층 목조 주택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이곳에는 지금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 시기 피난처'라는 현판을 걸고 침실과 서재 등 생활 공간을 복원해두었는데요. 일제 군경이 체포하러 오면 2층 침실 귀퉁이 비밀 계단으로 빠져나가, 호숫가에 매어놓은 쪽배를 타고 달아나도록 한 시설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싱에는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와 김구의 또 다른 피난처였던 재청별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내국인, 외국인을 가릴 것 없이 당국한테 허가받지 않은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 촬영을 하거나 구호를 외치는 행위를 규제합니다.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제한한 것이죠. 관광객이 많은 상하이에서는 규제가 더욱 심했습니다.
임시정부 이동 경로. (사진 출처=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저장성 자징시에서는 달랐습니다. 지방 당국은 임시정부 사적지를 중심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관광특구 거리를 조성해놓았습니다. 찻집과 식당가, 기념품점도 볼만했죠. 김구 피난처 등이 대표 볼거리였고요. '시민모임 독립'이라고 적은 현수막도 자유롭게 내걸 수 있었습니다.
중국 지방정부가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를 관광 콘텐츠로 삼아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데요. 나쁠 게 없죠. 항저우와 전장시도 비슷했습니다. 지방정부가 임시정부 사적지에 직원을 두고 성의 있게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은 대개 상하이 위주로 답사를 갑니다. 자싱과 항저우, 전장은 거의 가지 않죠. 이곳 사적지들은 단장해놓은 게 아까울 정도로 썰렁합니다. 우리 시민들이 시야를 넓혀 중국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널리, 활발하게 찾아다니면 좋겠습니다.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한중 우호 관계를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난징시에서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1937년 12월~1938년 1월 난징을 점령하고 30만명이 넘는 중국 민간인과 포로를 학살해 세계에 충격을 줬죠. 난징은 태평천국의 난 지도부와 신해혁명에 성공한 쑨원,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수도로 삼았던 도시입니다.
난징에서는 한해 사계절 엄청나게 많은 중국 시민이 대학살 기념관을 참관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 정부는 첫 번째 국가 이념으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를 꼽는데요.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기념관과 함께 난징대학살 기념관이 애국주의 교육의 으뜸 기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중국 정부가 애국주의 교육의 으뜸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시민모임 '독립' 제공)
우리는 독립운동 역사를 시대의 자산으로 삼아야 하는데요. 현실적으로는 그 역사와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국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는 국민의 군대'라는 표현을 국군조직법 제1조에 반영하자는 입법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죠. 이런 현실에서 중국 움직임은 참고할 만합니다. 물론 중국 정부의 애국주의 밀어붙이기에도 한계점은 있습니다.
난징에는 총통부, 임시정부 주화 대표단 본부, 이제항('위안부' 역사관), 항일항공열사 기념관, 조선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 터(천녕사) 등 볼만한 곳이 많았습니다.
난징을 답사하면서 머리에 떠오른 역사인데요. 중일전쟁 때 국민당 정부는 수도 난징을 빼앗기고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달아났습니다. 일본군이 맹렬히 추격했죠. 장제스는 추격을 지연시키려고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끔찍한 작전을 결정했습니다. 허난성 중부의 황허강 제방을 파괴한 거죠. 황허강은 중국 문명을 발원시킨 중국 중부의 거대한 하천입니다. 공병부대가 제방을 무너뜨리자 강물의 4분의 3에 이르는 몇백 미터 폭의 '죽음의 물줄기'가 중국 중부 평원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중국군 8사단 참모장 슝셴위는 "눈앞에 마치 바다가 나타난 것 같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남한 면적의 절반쯤인 5만4000㎢가 삽시간에 홍수에 휩쓸렸습니다. 1948년 국민당 공식 발표에 따르면 중국인 84만4489명이 사망했고 480만명이 이재민이 됐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 사망자가 50만명에 이재민은 300만~500만명으로 다소 줄었죠.
집권 세력한테 어떤 전략적 이익이 생긴다 해도 자국민 50만명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할 수 있나요? 장제스 국민당은 황허강 제방 파괴로 일본군 추격은 잠시 따돌렸지만, 자기네 국민에게 최악의 폭력을 저지른 집단으로 기록됐습니다.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뉴스토마토 객원논설위원과 뉴스토마토 K국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국방 생태계에서 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언론의 언어 왜곡>과 같은 책을 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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