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국내 정진대는 1945년 8월 일본 항복 직후 미군 OSS 대원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해 서울 진출을 시도하다가 일본군 저항에 부딪혀 8월19일 중국으로 돌아갔다.(사진=독립기념관)
22대 국회의원 총선이 끝난 뒤 한국 육군의 역사적 뿌리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이회영 기념사업회 같은 단체들이 5월3일 기자회견을 열어 육군사관학교(육사) 강의동 충무관 앞에 있는 독립운동가 5인 흉상을 그대로 두라고 요구했습니다. 광복회도 "육사는 독립 선열의 대일 항쟁 정신을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한다"며 "육사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유지하기 싫다면 차라리 폭파시켜라"고 주장했습니다.
육사는 문재인정부 때인 2018년 홍 장군과 이회영 선생, 이청천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 5인 흉상을 교내에 세웠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전쟁 정신을 사관생도 교육 지표로 삼고자 했죠.
윤석열정부 들어 육사는 독립운동가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했습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홍 장군이 1920년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을 일찍부터 문제 삼았는데요. 소련과 미국 중국 영국은 대일 항전 연합국 세력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연합국 세력과 손잡았으니 독립 유공자로 홍 장군은 전혀 손색이 없다고 윤석열정부 국가보훈부도 밝히고 있습니다. 육사 방침은 근거가 약합니다.
육군과 육사의 역사 인식에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육군과 육사는 1946년 미 군정이 설립한 국방경비대와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조직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군, 광복군 중심의 독립전쟁 역사는 육군이 조직 역사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광복군은 전투할 능력이 없었고 실제로 전투한 적도 없다고 깎아내립니다.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총기술 훈련사진. (사진=독립기념관)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첫째,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20차 국무회의(1941년 12월 9)를 열어 대일 선전포고를 단행합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이름으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일본에 대한 전면전은 물론이고, 연합국 일원으로 독일 이탈리아와도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임시정부 광복군은 선전포고에 그치지 않고 중국에서 한·중 연합작전,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 미군과 연합작전 등을 벌입니다. 드골이 이끈 프랑스 망명정부와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한테 2차 대전 승전국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한국 육군이 광복군 대일 항전 기록을 무시한다면 역사를 그릇되게 인식하는 거죠. 해군과 공군은 해양과 항공 분야 선각자들이 벌인 독립운동을 조직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임시정부가 참전외교를 벌인 끝에 광복군은 1945년 중국 주재 미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합작합니다. 전략첩보국은 미 합동참모부 산하 첩보작전 기구입니다. 중국 전구 미군 총사령관 웨드마이어는 대일 첩보작전에 한인 대원을 활용한다는 OSS 계획(독수리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광복군 대원들은 한반도에 침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미군 교관한테서 사격술, 폭파술, 무전교신 등 특수전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1기생으로 김준엽·장준하 등 50명이 선발됐죠.
셋째, 1945년 8월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았습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OSS 책임자 도노반 소장과 8월7일 중국 시안에서 만나 한반도 진입 군사작전을 개시하기로 서둘러 합의합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국내 정진대를 선발했고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등 4명이 첫 작전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미군은 책임자 버드 대령 등 18명을 추렸습니다.
대원 22명은 미군 C47 수송기로 중국 시안을 떠나 8월18일 낮 12시께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합니다. 일본 왕이 8월15일에 항복을 발표한 직후였습니다. 비행장에는 일본군 1개 대대와 탱크, 장갑차가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버드 대령은 일본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중장한테 연합군 포로 후송을 준비하려고 방문했음을 알리고 일본인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합니다. 일본군은 본국에서 지시받은 게 없다면서 빨리 이륙하라고 위협합니다.
정진대는 휘발유가 없어 이륙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이범석은 웨드마이어 사령관 고문 신분을 제시하면서 "너희들은 무조건 항복을 제시한 이상, 한국에 속죄하는 의미에서 무장해제를 먼저 해서 한국에 무기를 인계하라"고 요구합니다.
일본군 강압에 대원들은 다음 날 오후 이륙해 중국 산둥으로 회항했습니다. 이 작전을 여의도 진공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드골 망명정부는 히틀러한테 프랑스 본토를 빼앗기자 알제리 등 자국 식민지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를 물리력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식민지로 떨어졌던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무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광복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 하려고 목숨을 건 작전을 펼쳤습니다.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기록을 한국 육군은 역사에 반영해야 합니다.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역사관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특전사는 한국전쟁 당시 첩보 수집 활동을 한 비정규전 유격대를 부대 기원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흔히 공수부대라고 알려진 특전사는 전쟁 때 적 후방에 침투해 비정규전을 벌입니다.
광복군 대원들이 미군 OSS 부대와 합작해 특수전 교육을 받은 사실, 교육받은 대원들이 벌인 여의도 진공 작전. 특수작전 모범 사례죠. 특전사가 이 사건을 부대 기원으로 받아들여 기리면 어떨까요? 특전사가 선배들 기운을 받아, 더욱 강하고 명예로운 부대로 거듭날 것입니다.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말하기와 글쓰기, 언론 홍보와 위기관리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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