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박혜정 기자] ‘수입산 무덤’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한국 가전 기업들의 존재감은 미미합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LG전자는 프리미엄 가전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지만, 시장 내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반면, 자동차와 배터리 분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현대차·기아는 소형 전기차 ‘인스터’를 앞세워 일본 시장 재도전에 나섰고, K-배터리 3사는 태양광 인프라 확산과 전력 요금 상승에 따른 수요 증가를 겨냥해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산업이 일본 시장에서 다시 반등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됩니다.
2022년 2월 일본 도쿄 오테마치 미쓰이홀에서 열린 현대차 미디어 간담회에서 아이오닉5(왼쪽), 넥쏘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현대차)
러시아 시장 재진입을 앞둔 현대차·기아가 ‘자동차 강국’ 일본의 문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차는 2001년 처음 일본에 진출했다가 판매 부진으로 2008년 말에 철수했습니다. 당시 일본 내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고, 도로 폭이 좁고 이면도로가 많은 일본 사정을 고려할 때 소형차 시장부터 공략할 필요가 있었으나 중형차부터 내놓은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일본의 전기차 시장 가능성에 주목하던 현대차는 지난 2022년 2월 무공해 차량(ZEV)을 중심으로 일본에 재진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본의 전기차 보급 속도는 미·중과 비교하면 느리지만, 지속 성장하고 있어 향후 시장성은 충분합니다. 일본 자동차판매협회연합회(JADA)에 따르면 2022년 일본의 연료별 판매 대수는 하이브리드 108만9077대, 플러그인하이브리드 3만7772대, 전기차는 3만1592대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성장률은 전기차가 149.4%로, 하이브리드의 106%를 앞섰습니다.
다만, 지난 2023년 일본에서 전체 판매된 전기차 중 55%가 경차였던 점을 미뤄볼 때 현대도 소형차 중심으로 내놓는 것이 시장점유율 확대에 유리합니다. 현대차는 올해 초 소형 전기차인 인스터(INSTER·수출용 캐스퍼 일렉트릭)를 일본에 출시하며 경차 시장 공략에 나섰습니다. 이서현 한국자동차연구원 산업분석실 선임연구원은 “일본 소비자가 요구하는 상품성 높은 소형 전기차를 주력으로 제시해야 한다”며 “닛산, BYD 등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차(한국의 경차보다도 작은 일본 독자 규격)를 우대하는 조세 재정 정책과 좁은 도로 특성상 소형차 수요가 높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K-배터리, ESS로 ‘틈새 공략’
K-배터리도 ESS를 중심으로 일본 시장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ESS는 태양광·풍력 발전으로 생긴 전기를 배터리처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쓰는 장치입니다. 전력 수급이 원활한 아파트 위주의 한국에선 ESS 시장이 크지 않지만, 지진이 잦은 일본엔 가정용 ESS가 많이 보급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전기료가 한국보다 2.8배 정도 비싼 일본은 전기 요금을 아끼기 위해 단독주택에 태양광을 설치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 전력망용 ESS 배터리 컨테이너 제품. (사진=LG에너지솔루션)
최근 LG에너지솔루션은 일본 전자업체 옴론과 연간 2GWh(기가와트시) 이상 규모의 가정용·상업용 리튬인산철(LFP) ESS를 5년간 공급하는 계약을 최종 조율 중입니다. 삼성SDI도 2012년 도쿄에 판매법인을 설립하고 ESS 시장을 공략해왔습니다. 여기에 일본 정부가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보급을 위해 설비 확대가 긴요하다며 연간 20GWh인 배터리 셀 생산 능력을 2030년까지 150GWh로 확대하겠다는 목표여서 ESS 수요 확대도 기대되는 상황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보급이 더딘 전기차 시장 대신 수요가 큰 ESS 시장을 현지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공략하는 것이 ESS를 포함한 일본 배터리 시장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도 “현지 ESS 시장 1위 파나소닉을 단기간에 넘어서긴 어렵지만, 삼성SDI·LG엔솔·SK온이 공동 서비스망을 구축해 A/S 접근성을 높인다면 일본 소비자의 신뢰 확보에 유리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넘지 못한 자국 브랜드 철옹성
K-가전 대명사 삼성전자와 LG전자는 1980년대부터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려왔습니다. 삼성전자는 1980년대 일본 법인을 설립했고, LG전자(당시 금성사)도 1981년 도쿄에 법인을 세우며 본격적인 공략에 나섰습니다. 시장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자국 전자기업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미 자국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 소비자들의 높은 브랜드 충성도 탓에 외국 기업 제품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다만, 성장기에 있던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수혜를 입었습니다. 일본 전자제품에 한국 반도체가 탑재되면서 대일본 반도체 수출이 증가한 것입니다. 이 시기 한국의 대일본 반도체 수출 점유율은 10~20%대를 유지했습니다. 1997년에는 일본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가 33.6%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전자산업은 2000년대 들어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일본 기업들이 외산에 대응해 가격을 대폭 낮추면서, 한국 기업들이 적정 이익을 확보하기 더 어려운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삼성전자는 2007년 스마트폰 사업만 남기고 일본 가전 사업을 중단합니다. LG전자도 2008년 가정용 TV 시장에서 철수하며 일본 시장에서 한발 물러났습니다.
일본 전자기업들의 글로벌 수출이 감소하면서, 이후 한국의 대일본 반도체 수출액도 빠르게 줄어들게 됩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일본 전자업체들이 주로 해외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고, 일찍 제조업 공동화가 진행돼 자국 내 반도체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프리미엄·현지 전략으로 재진입
K-전자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부터입니다. LG전자는 2010년 LED TV, 시네마 3D TV 등 프리미엄 제품을 앞세워 가정용 TV 시장에 재도전했습니다. 스타일러, 와인셀러, 건조기 등 프리미엄 생활가전도 선보이며 틈새시장을 공략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2018년, LG 시그니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와 세탁기가 일본 최고 권위의 디자인상인 ‘굿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하는 성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OLED TV는 일본 시장에서 소니, 파나소닉에 이은 3강을 이뤘습니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LG전자는 지난해 1분기 일본 OLED TV 시장에서 11.4%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넘기는 실적을 내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는 2010년 이후 일본 스마트폰 시장에서 연간 점유율 5% 안팎에 머물렀지만, 유의미한 실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2012년 4분기 삼성은 점유율 17%로 애플에 이어 2위에 올랐고, 2022년 1분기에도 13.5%를 기록하며 다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애플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결과입니다. 2023년 삼성전자는 2015년부터 제품에서 삭제했던 삼성 로고를 다시 휴대폰에 새기기 시작했고, 일본 내 갤럭시 고객센터를 확대하는 등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국내 기업들이 철수했던 사업을 재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폐쇄적인 일본 시장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이라며 “프리미엄 시장에 대한 수요가 있는 동시에 일본 내 가성비 소비 흐름이 있는 만큼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입산 무덤’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K산업이 다시 기회를 움켜쥘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끝>
오세은·박혜정 기자 os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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