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정부의 고강도 규제로 가계대출을 취급할 여력이 줄어든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습니다. 가계대출 축소로 악화하는 수익성을 보전하기 위한 전략인데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자금 중개 확대는 정부에서도 지속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대기업 대출 쏠림 현상이 짙어지면서 정작 '자금 수혈'이 절실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대기업에 자금 몰아준 은행
8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지난달 말 기준 대기업 대출 잔액은 165조6500억원으로 지난해 말 158조3900억원 대비 7조2600억원(4.6%)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전체 기업대출이 9조1159억원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전체 증가분의 약 80%를 대기업 대출이 차지했습니다.
대기업 대출이 올 들어 확대된 것은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해 영세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보다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출을 확대한 영향입니다.
대기업 대출 쏠림 현상은 하반기에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부가 지난달 27일 수도권·규제지역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면서 은행들의 하반기 가계대출 총량 목표도 당초 계획의 50% 수준으로 감축했기 때문입니다.
은행권 입장에서도 가계대출 감소에 따른 수익 보전을 위해 은행들은 이전보다 기업대출 확대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정부가 수도권 주담대를 최대 6억원으로 제한하는 기습 대출 규제를 시행한 이후 은행권의 하루 평균 주담대 신청액이 절반 넘게 줄기도 했습니다.
지난해도 금융당국이 하반기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강화하자 은행권의 기업대출 규모가 불어난 바 있습니다. 경기 둔화가 장기화하면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를 중심으로 연체율과 고정이하여신이 급증하자,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 대출 위주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지난 1분기 5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0.59%로, 작년 말보다 0.10%p 상승했습니다. 최근 8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기업대출 부문 고정이하여신 규모도 4조6626억원을 기록하며 같은 기간 20% 넘게 급증했습니다.
5대 은행이 올 들어 대기업 대출을 9조1159억원 늘린 반면 중소기업 대출은 3조3910억원 늘리는 데 그쳤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은행 영업점 기업고객 창구 모습.(사진=뉴시스)
중기·자영업자 대출에 소극적
은행들이 대기업 대출을 선호하는 것은 통계에서도 확인됩니다. 한국은행의 '금융기관 대출 행태 서베이'에 따르면 2분기 은행의 대출 수요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에 비해 금융기관이 대출에 얼마나 적극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출 태도에서는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에 대해 까다로워질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은행이 대기업에만 집중하는 것은 보통주자본(CET1) 비율 관리 영향도 있습니다. CET1 비율은 자본 건전성을 평가하는 지표입니다. 지난해 밸류업의 일환으로 주요 금융지주는 CET1 비율이 13%를 넘어서면 주주환원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는데, 이후 13%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연체율이 높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대출은 동일한 금액의 대기업 대출에 비해 위험가중자산을 더 키우게 되고, CET1 비율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만 경기 침체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가 자금난 등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시중은행들이 대출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재명정부는 주택을 담보로 한 대출과 주택도시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정책대출을 늘리는 은행의 관행을 바꾸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가계 또는 부동산 부문에서 발생할 수 있는 편중 리스크 또는 시스템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금융회사에 완충자본을 부과하는 자본 규제를 도입하고 주택담보대출 등의 규제 비용을 높여 은행이 기업대출보다 주택담보대출의 공급을 선호하는 유인을 축소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대출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은행에 인센티브 제공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중소기업 대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은행 자체적인 대출 행태 변화에만 기대하기는 힘들고, 정부 차원에서 자본 건전성 규제 완화 등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기업 대출 쏠림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자금 수혈이 시급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들이 소외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상가에 임대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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