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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이진하 기자] 국민의힘 대선 주자 '김문수'의 삶은 격동의 대한민국을 잘 보여줍니다. 노동·민주화 운동의 전설로 불리며 옥살이를 했고, 온갖 고난을 겪은 후 보수 정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3선 의원과 두 차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는데요. 그러다 두 차례 선거에서 낙선을 겪고, 야인으로 광장의 '극우' 세력과 결집하는 등 양극단의 활동을 모두 보여준 인물입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4일 경남 밀양 내일동 밀양관아 앞을 찾아 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가난했던 어린 시절…'반골' 기질 청년으로 성장
1951년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집에 전깃불도 안 들어와 저녁이면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공부를 잘해서 지역의 명문인 경북중·고에 진학했는데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수양동우회'란 동호회에 가입해 사회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무기정학을 당했습니다. 1970년 다행히 정학이 풀려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골' 기질은 변하지 않았는데요. 당시 유행하던 민족주의에 심취해 운동권 학생이 됐습니다. 이듬해 10월 위수령 발동 직후 제적됐습니다.
김 후보는 여름방학 때 공장에 '위장 취업'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동대문시장 봉제공장과 재단 보조 등으로 일하다가 학교의 복교 조처로 복학했는데요. 이후 민청학련 조직을 주도하다가 1973년 두 번째 제적을 맞고, 수배 대상까지 됩니다. 1976년 김 후보는 한일공업 노조 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2019년 9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노동운동 전설'서…'보수 정치인' 첫발
1980년 2월 반국가 모임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구타와 가혹 행위 등 고문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후 두 달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다시 노동현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이후 그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노련 지도위원 등을 역임하며 노동운동계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1986년 김 후보가 두 번째 수감됩니다. 당시 그는 서노련 지도위원으로서 인천 5·3 민주항쟁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요. 물·전기고문 등 강도 높은 고문 속에도 핵심 활동가를 불지 않아 '운동권의 전설'로 평가받게 됩니다. 당시 김 후보는 국가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3년·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는데요. 2년 6개월 옥살이 끝에 198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합니다.
김 후보가 출소한 직후 소련이 붕괴를 맞이하고, 그는 혁명을 포기합니다. 이후 대안으로 합법 진보 정당을 통한 원내 진입을 위해 이재오 전 의원과 1992년 민중당을 창당했지만, 총선에서 1명도 당선시키지 못해 당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보수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영입해 국회의원 3선과 경기도지사 2번을 역임하며 화려한 정치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하루 앞둔 2016년 4월 12일 오후 대구 수성구 신매광장에서 새누리당 김문수(대구 수성갑) 후보가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3선 의원·2선 경기지사…20년 정치인생도 '꼿꼿'
노동운동을 하던 김 후보는 보수 정당에 들어가 처음에는 '변절자'란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6년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열세라고 불리는 경기 부천 소사 지역구에서 박지원 의원을 꺾고, 국회에 입성합니다. 그렇게 김 후보는 탄탄대로 정치 인생을 시작하는데요. 특히 그가 정치인으로 유명해진 것은 2003년 '차떼기 정국'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속한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 중 붕괴 위기를 맞았는데요. 그러자 당에서 젊은 개혁파인 김문수 당시 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확정하며 중책을 맡겼습니다. 김 후보의 '꼿꼿'한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며 공천심사위에 국회의원 대신 외부 인사를 대거 참여시켰습니다. 온갖 유혹을 차단시킨 그는 당시 자신에게 자리를 맡겼던 최병렬 당대표도 공천에서 탈락시키며 눈길을 끌었는데요. 경기지사로서는 GTX 사업을 처음 계획하며 상당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행정가로 입지를 다지던 김 후보는 '갑질 논란'으로 곤혹을 치었습니다. 2011년 남양주 소방서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나 도지사 김문수입니다"라고 말하며 수화기 너머 관등성명을 요구했고, 관련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자유한국당 김문수 비상대책위원이 2017년 3월 서울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연패 후 '광장'으로…윤정부서 장관으로 부활
이후 김 후보는 두 차례 선거에 나섰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습니다. 제도권 밖으로 밀린 김 후보는 이때부터 '보수'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등 점차 오른쪽으로 활동 범위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팔트 집회를 주체하는 '사랑의교회' 전광훈씨와 손을 잡았던 그가 다시 정치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2022년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이후입니다.
윤석열정부에서 장관급 대통령자문위원장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임명됐는데요. 그렇게 2년의 활동 후 지난해 8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돼 국무위원이 됐습니다. 이후 12·3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그는 정치 커리어의 정점을 찍게 되는데요. 김 후보는 당시 야당이 요구한 비상계엄 사과를 거부하고, 윤석열씨 탄핵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보수층의 지지세를 얻었는데요. 그 결과 3차례 진행된 대선 경선에서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당시 야당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하여 '꼿꼿 문수'란 별명을 얻었는데요. 이후에도 당 지도부와 '한덕수 후보 옹립'으로 갈등을 겪지만, 강직함을 유지하며 대선후보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김 후보는 공식 선거 운동 첫날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살아왔다"며 자신의 삶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진하 기자 jh3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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