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수컷이 눈이 쌓인 경기 남양주시 한강변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한국 곳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슴과 동물이 있습니다. 도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모습으로 익숙한 동물, 바로 고라니입니다. 산과 들, 하천 뿐만 아니라 도심 주변에서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이기도 합니다.
1870년, 영국의 동물학자 로버트 스윈호(Robert Swinhoe)는 중국 장강 유역에서 고라니를 발견하고 ‘물을 마시는(Hydropotes)’, ‘뿔 없는(inermis)’ 동물이라는 뜻의 학명을 붙였습니다. 이는 습지를 좋아하는 고라니의 생태적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었습니다. 이후 1884년, 프랑스 동물학자 피에르 마리 휴드(Pierre Marie Heude)는 한국에서 발견한 고라니를 독립된 아종으로 보고, ‘은빛 발(argyropus)’이라는 뜻의 ‘Hydropotes inermis argyropus’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의 고라니는 환경 차이에 따른 변이일 뿐, 본질적으로 같은 종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 고라니는 한국에서 가장 흔한 야생동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전 세계적으로는 개체 수 감소로 인해 보호가 필요한 종입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멸종에 ‘취약(Vulnerable)’한 종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개체 수 복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너무 익숙하다는 이유로 보호의 필요성이 크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라니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로드킬 피해를 입는 동물입니다. 연평균 약 9000건 이상의 로드킬 사고가 발생하며, 전체 로드킬 야생동물의 67%를 차지합니다. 이는 고라니가 도로위에서 자동차 불빛을 보면 도망치기보다 순간적으로 멈춰버리는 정지 반응 때문입니다. 고라니는 위협을 느낄 때 몸을 낮추고 가만히 멈춰 있는 습성이 있는데 이 반응이 도로에서는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빠르게 달려오는 차량을 보고도 본능적으로 멈춰 서게되면서 로드킬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죠.
발정기를 맞는 고라니 무리가 강원 철원군 한탄강가에서 배우자를 차지하려고 뛰어다니며 힘 자랑을 하고 있다.
만약 도로 위에서 고라니를 마주친다면 잠시 속도를 줄이고 고라니가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작은 주의가 고라니의 생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고라니는 원래 습지와 숲에서 살아가던 동물이지만 도시 개발과 서식지 감소로 인해 점점 농경지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연한 새순과 채소를 선호하는 고라니의 식성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증가하면서 농민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매년 수천 마리가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돼 포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단순히 고라니의 개체 수 증가가 아니라 서식지 감소로 인해 고라니가 먹이활동을 할 곳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라니가 처한 이 상황은 다큐멘터리 '그해, 지구가 바뀌었다(2021)'에 등장하는 인도 아삼 지역의 코끼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코끼리들은 숲이 농지로 개간되면서 서식지를 잃었고 인간과 코끼리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환경 보전 NGO와 지역 공동체가 나섰습니다. 코끼리의 이동 경로에 벼와 풀을 심어 완충지대를 만들고 서식지 밖에서도 코끼리가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죠. 덕분에 마을도, 코끼리도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코끼리와 마을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고라니와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갈 실질적인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한 전기 울타리를 설치하거나 고라니가 좋아하는 특정 식물을 활용해 유인하는 방안이 연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도로에서는 고라니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생태통로를 늘리는 것이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곧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입니다. 봄이 오면 새순이 돋고 자연이 다시 기지개를 켜듯이 우리가 고라니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을까요? 그 동안 우리는 고라니를 유해동물로만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고라니는 농작물 피해만 끼치는 동물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갈 길을 찾고 있을 뿐이지요. 올해는 고라니를 단순한 ‘유해동물’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친구’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친절한 시선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좀 더 따뜻하고 조화로운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글·사진= 김용재 생태칼럼리스트 K-wild@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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