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금융사들이 잘못된 판단과 상품으로 투자자와 소비자를 울상짓게 하는 가운데 노사간에 주목을 끌만한 합의안이 마련됐다. 지난달 30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의 산별교섭회의에서 총액임금 2.0%를 기준으로 한 올해 임금 인상률을 골자로 한 임금협약을 체결했다.
이같은 인상률은 근래 보기 드물게 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 들어와서 학자금이나 건강보험 보장을 확대하는 등 중산층과 서민의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왔다. 이번의 낮은 인상률 합의도 그런 노력이 낳은 효과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진다.
더 주목을 끄는 합의내용도 있다. 저임금 직군에 대해서는 정규직 인상률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임금인상률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 일반 정규직과 저임금 직군 간 불합리한 임금 격차를 축소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나아가서 사내근로복지기금의 수혜 범위를 파견직과 용역근로자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모처럼 폭넓은 시야를 갖고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의식을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계열 사무금융노조도 올 연초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조건으로 임금 인상을 양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사업 과제는 비정규직 격차 해소 등 노동시장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는 한국제2금융권 금융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사회연대기금을 출연했거나 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테면 한국증권금융은 지난 7월 노조와 함께 사무금융우분투재단에 총 3억6000만원의 사회연대 기금을 출연했다. 우분투재단은 이렇게 조성된 연대기금을 제2금융권 비정규직 등을 위해 사용한다. 지난 6월에는 한국장학재단에 대학생 생활비 장학금 1억5000만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금융산업은 한국의 대표적인 고임금 직종에 속한다. 직원의 평균임금이 높을 뿐만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연봉도 재벌 총수 못지 않다. 업무 자체가 지식산업에 속하고 이에 따라 직원들의 학력과 지식수준이 다른 직종에 비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저임금 직군의 노동자나 비정규직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었다. 이제라도 시야를 넓히고 새삼 ‘배려’의 자세를 갖게 됐으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폐해 가운데 하나는 과도한 임금격차다. 이 때문에 우수한 인력이 중소기업에 들어가기를 기피한다. 이는 중소기업을 포함한 전체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임금격차가 노조만 책임질 일은 아니다. 오랜 동안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과 강고한 지배력도 한몫해 왔다. 특히 재벌 총수 일가를 비롯한 고위경영자들은 과도한 연봉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배당까지 받아간다. 그것도 1개 계열사가 아니라 여러 계열사에 이름을 올려두고 거액의 보수를 챙긴다. 이들은 기업이 적자를 내는 등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받을 것은 양보없이 고스란히 다 챙긴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때로는 연봉을 올리기까지 한다. 이같은 2중, 3중의 권력행사와 도덕적 해이는 금융사 최고경영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악습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더 큰 임금인상 요구를 불러들인다. 이런 식으로 한국사회의 임금격차 구조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자리잡았다. 그 해결의 돌파구가 한없이 멀어만 보인다. 마치 다이달로스가 설계해서 지었다는 크레타의 라비린토스(미궁) 같다. 미궁탈출을 위해 누군가 아리아드네 공주처럼 실마리를 풀어 주어야 한다. 재벌 총수나 고위경영진, 혹은 금융사의 고위경영진이 그런 실마리를 마련하거나 풀어주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다행히 금융사나 대기업 노조라도 나서주면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양보하는 모습을 먼저 보임으로써 재벌 총수와 금융사의 고위경영진에 대한 압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금융노조와 사무금융노조가 아리아드네 공주의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미궁의 실마리를 앞장서서 풀어보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용기있고 신선한 일이다. 그런 솔선수범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일단 시작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기대를 걸어보고자 한다. 이같은 결심과 노력이 우리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을 비롯해 사회 각분야에 폭넓게 확산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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