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황정민은 카메라 안에서 늘 싸워왔다. 화교 출신 조직폭력배로 경찰과 싸웠고(영화 '신세계'), 광역수사대 경찰로 비리검사와 맞붙기도 했으며('부당거래'), 절뚝거리는 다리로 가난을 이기려 했으며('국제시장'), 경제 권력과 담판을 짓기도 했다('베테랑'). 늘 무엇인가와 대치했던 황정민은 이번에는 에베레스트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섰다.
싸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황정민이지만 자연 앞에서만큼은 포용의 자세로 나섰다. 주위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간적으로 다가갔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늘 고독한 위치에서 주위를 살펴야 하는 대장을 연기한 황정민은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를 입증하겠다는 듯이 또 한 번 진가를 발휘했다.
황정민이 엄 대장이 된 '히말라야'는 개봉 3주 만에 650만 관객을 동원했다. 다소 생소한 산악영화 장르이기에 핸디캡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였다. 여전히 주말마다 50만이 넘는 관객이 히말라야에 오른 원정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또 한 번의 천만 영화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그 중심에 황정민이 있다.
히말라야의 중심에 섰던 황정민을 최근 서울 삼청동 소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황정민은 강풍과 눈보라가 치는 설산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엄홍길 대장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는 "나도 그렇게 외로웠는데, 엄 대장은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이 안 된다"고 말했다.
황정민. 사진/CJ엔터테인먼트
"엄홍길 대장의 외로움과 맞닿았다"
황정민이 '히말라야'를 선택하는 데는 큰 고민이 없었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산악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고, '댄싱퀸'에서 인연을 맺은 이석훈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좋았다. 산악영화를 만드는데 직접 산을 오르지 않는 건 직무유기라고 생각한 이석훈 감독의 '에베레스트를 오르자'는 용단에 당연하게 동의했다. 호기심과 인연의 소중함,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한 '히말라야'는 상상보다도 힘든 숙제를 던져줬다.
고도 5000m에서 강추위 속 진행한 촬영이 어땠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밥을 먹는 것도 일이었고, 무거운 장비를 드는 것도 배우의 몫이 됐다는 후문이다. 고된 환경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것 역시 10여년간 연기 훈련한 사람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정민은 맨 앞에서 대장으로서 책임감을 내세우며 솔선수범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산악대에서 대장의 역할은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요. 대장의 결정에 목숨이 좌우돼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되고 홀딱 벗겨질 수 있다는 거죠. 비록 연기를 하는 입장이지만, 우리도 원정대를 이끌고 네팔과 몽블랑에 갔어요. 나는 또 형이고 주인공이고 대장 역할을 맡았으니까 실제 대장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누구보다도 분량이 많아 제일 늦게 끝나는 일이 잦았고, 다른 영화와 일정이 겹치면서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컸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일찍 촬영장에 나왔고, 누구보다도 무거운 짐을 날랐으며, 늘 제일 앞에 섰다. 그런 과정에서 오는 고독함과 외로움은 실로 무거웠다고 한다.
"저는 뭐 사람이 아닌가요. 힘들죠. 맏형이니까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정말 외로웠어요. 그러면서 나도 이렇게 힘든데 엄홍길 대장은 얼마나 힘들었고 외로웠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감정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엄 대장에 빙의가 되는 지점이 생기더라고요.“
'히말라야'에서 황정민의 얼굴은 '국제시장'의 덕수와 '베테랑'의 서도철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분명 다르다. 좀더 진중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인간미의 폭이 넓어진 느낌이다.
"아마도 엄홍길 대장이 느꼈던 외로움이나 부침을 저도 조금은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외로움이 연기에 드러나길 바라긴 했어요. 관객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면 하네요."
황정민은 단순히 연기만 하지 않았다. 스태프들의 회의에 모두 참석하면서 촬영과 관련된 상황을 배우들에게 설명했다. 스태프가 할 역할을 배우팀 대장으로 하게 된 것이다.
"원래 제가 그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뒤에서 수다 떨면서 웃기나 하는데, 이번에 처음 솔선수범이라는 걸 해봤어요. 어쩔 수 없었죠. 산악영화가 처음이었고 레퍼런스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어떤 촬영현장이든 스태프들과 웃고 떠들며 친분을 쌓았던 황정민은 이제 현장의 어른의 위치가 됐다. 어린 스태프들과는 10여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난다.
"어느 순간 제가 형이나 선배가 됐더라고요. 저를 어려워하는 게 보였어요. 어린 친구들과 같이 술도 먹고 즐기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거죠. 적어도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계산만 해주고 일어났어요. 하하."
황정민. 사진/CJ엔터테인먼트
"실화와 같을 필요는 없었다"
'히말라야'를 본 관객들이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지점은 박무택(정우 분)의 아내였던 정유미가 원정대에 박무택을 그냥 두고 오라고 설득하는 부분이다. 죽은 남편의 시체를 들고 가파른 산을 내려오는 원정대를 향한 착한 마음씨가 심금을 울린다. 이 장면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닐 뿐더러 완성된 시나리오에도 없었다고 한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그 장면이 원래는 없었어요.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만든 장면이죠. 관객들은 돈을 내고 보는데 뭔가 보여줘야 하잖아요. 정상을 찍으러 올라간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시체를 운구하러 간 거잖아요. 걸음 자체가 달랐을 거란 말이죠. '우리가 진짜 보여줘야 하는 건 그런 착한 마음이 아니었냐' 하면서 논의를 했고, 그렇게 그 장면이 탄생했어요. 우리는 영화인데 꼭 다큐멘터리, 실화와 같을 필요는 없잖아요."
본편을 시사회를 통해 본 황정민은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생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얻어낸 결과가 꽤나 만족스러웠다는 반응이다.
"우리가 이런 걸 했다는 게 기뻤어요. 너무 힘들어서 촬영이 빨리 끝나길 바랐고, 빨리 잊혀지길 바랐는데, 영화를 보니 그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정말 우리 '히말라야' 팀 수고했고, 고생했어요."
'국제시장'과 '베테랑'에 이어 '히말라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황정민의 다음 행선지는 감옥이다. 2월 4일 개봉 예정인 '검사외전'에서 감옥에 간 검사를 연기했다. 세 편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감동과 흥분을 안겼던 황정민은 '검사외전'에서 관객들의 '배꼽'을 타깃으로 잡았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 즐거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벌써부터 2월을 바라보는 황정민은 당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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