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이 혈압 수치로 드러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뇌 혈관과 신경세포를 손상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고혈압 환자의 치매 발생 위험이 높은 이유가 단순한 혈압 상승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일어나는 세포 단위의 변화 때문일 가능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심뇌혈관질환 예방관리 합동캠페인에서 고혈압·당뇨·콜레스테롤 수치를 측정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 웨일코넬의대 연구진은 11월14일 국제 학술지 <뉴런(Neuron)>에 발표한 논문에서 “고혈압을 유발한 뒤 3일 만에 뇌세포에서 광범위한 유전자 변화와 조기 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눈에 보이는 혈압 변화보다 뇌 내부의 손상이 먼저 진행된다는 점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혈압 상승 전부터 뇌 세포 변화
연구진은 고혈압을 일으키는 호르몬 ‘안지오텐신’을 쥐에게 투여한 뒤, 3일째와 42일째 뇌 변화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혈압은 정상인 상태임에도 3일째부터 뇌세포 손상이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혈압 유발 후 3일 만에 혈관 내피세포(endothelial cells)에서 에너지 대사가 감소하고 조기 노화가 진행됐습니다. 또한 혈뇌장벽이 약화되는 초기 신호가 관찰되었습니다. 이 혈뇌장벽은 외부 유해물질이 뇌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는 핵심 방어선으로, 그 노화는 독성 물질이 뇌로 유입되는 중요한 ‘치매 촉발 신호’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경 신호를 조절하는 인터뉴런(interneurons)에서도 손상이 나타났습니다. 흥분·억제 신호의 균형이 깨지며, 알츠하이머 환자에서 보이는 신경 패턴과 유사한 변화가 확인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억력·주의력 저하와 직결되는 변화입니다. 신경섬유를 감싸는 마일린을 만드는 세포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장기적으로 신경전달속도 저하가 이뤄졌고, 42일째에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심해지면서 인지 기능 손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논문의 교신저자인 코스탄티노 이아데콜라(Costantino Iadecola) 교수는 “우리는 인지 기능 저하를 유발하는 주요 세포들이 혈압이 상승하기 전인 고혈압 유도 3일 만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혈압 조절 이상을 넘어선 요인이 관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압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의료계에서는 고혈압이 오랜 기간 높은 압력으로 혈관을 손상시키고, 그 때문에 치매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원인을 제시합니다. 뇌세포 수준의 변화는 혈압 수치 상승이 나타나기 며칠 또는 몇 달 이전에 시작될 수 있고, 고혈압의 ‘압력’만 문제가 아니라 안지오텐신 호르몬이 직접적으로 뇌세포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혈압이 없는 생쥐의 대뇌 피질(왼쪽)에서는 대부분의 내피세포가 정상(노란색)이며 노화 또는 노쇠화(파란색)를 보이는 세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고혈압을 유발하는 안지오텐신 투여 후(가운데)에는 노쇠화된 내피세포(파란색)가 훨씬 더 많이 관찰된다. 안지오텐신 수용체를 차단하면(오른쪽) 피질 내피세포가 회복된다. (사진=Weill Cornell Medicine, Dr. Anthony Pacholko)
고혈압 환자는 일반인보다 인지장애 위험이 1.2~1.5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혈압약이 인지 기능 개선에는 큰 효과를 보이지 않았던 점은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는 고혈압의 생물학적 변화가 혈압 상승보다 먼저 뇌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논문의 공동 저자인 앤서니 파콜코(Anthony Pacholko) 박사는 “고혈압이 초기에 유발하는 변화의 정도가 상당히 놀라웠다”며 “고혈압이 질병 초기 단계에서 세포 및 분자 수준에서 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면 고혈압 환자의 신경 퇴행 진행을 막는 치료 전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추가 실험에서 연구진은 일부 인간 연구에서 안지오텐신 수용체 억제제가 혈압을 낮추는 다른 약물보다 인지 건강에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데이터가 제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실험용 쥐에 고혈압 치료제인 로사르탄(losartan)을 투여했습니다. 그 결과 조기 노화가 진행된 내피세포가 회복되고, 손상된 인터뉴런의 기능이 개선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효과는 혈압이 상승하기 전 단계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로사르탄이 생쥐 모델에서 고혈압이 내피세포와 중간신경세포에 미치는 초기 영향을 역전시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고혈압, 조기 치료가 정답
이아데콜라 교수는 “고혈압은 심장과 신장 손상의 주요 원인이며, 항고혈압제로 예방할 수 있다. 따라서 인지 기능과 무관하게 고혈압 치료는 어떤 경우에도 최우선 과제”라고 고혈압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심장이나 신장 보호를 위해서든, 치매 예방을 위해서든 고혈압 치료는 조기에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치료는 ‘빨리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번 연구는 일깨워줍니다.
연구진은 현재 고혈압으로 인한 소혈관의 조기 노화가 세포 손상과 결함을 어떻게 유발하는지 후속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연구진은 적절한 시기에 고혈압이 인지 기능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예방하거나 역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밝혀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미국 NIH, 알츠하이머협회, Cure Alzheimer’s Fund 등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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