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가장 친근한 천체인 달은 예로부터 외로움, 사랑 등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왔으며, 시대를 초월해 예술 작품에 가장 빈번히 등장해온 상징입니다. 그러나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천문학의 오랜 난제였습니다.
지난 5일 오후 제주시 동쪽 하늘 위로 6년 만에 가장 큰 보름달인 ‘슈퍼문(Supermoon)’이 떠오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약 45억년 전, 화성 크기의 원시 행성 테이아(Theia)가 초기 지구와 충돌했고, 이때 발생한 파편들이 뭉쳐 달이 되었다는 ‘거대 충돌 가설(Giant Impact Hypothesis)’입니다. 이 가설은 달의 공전 궤도, 크기, 작은 철 핵 등 여러 특징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수십 년간 과학자들을 괴롭혀온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습니다. 바로 ‘동위원소의 위기(Isotopic Crisis)’라는 문제였습니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달의 물질은 충돌체인 테이아의 물질이 주로 기여해야 하지만, 실제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서 가져온 암석을 분석한 결과 산소(O), 텅스텐(W), 티타늄(Ti), 크로뮴(Cr) 등 여러 원소의 동위원소 비율이 지구 맨틀과 놀랍도록 유사했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유사성이 거대 충돌 가설의 모순이었습니다.
원시 행성 ‘테이아’ 흔적 추적
그런데 최근 막스 플랑크 태양계 연구소(MPS)의 티모 홉(Timo Hopp) 박사가 주도한 국제 공동 연구팀이 이 오랜 난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저명한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이들의 논문은 달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도정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구팀은 기존에 많이 연구된 산소나 티타늄 대신, 미량 원소인 몰리브덴(Molybdenum, Mo)에 주목했습니다. 몰리브덴은 친철(親鐵, siderophile) 원소로, 행성이 형성될 때 대부분 무거운 철과 결합해 핵(core)으로 가라앉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의 맨틀이나 달에 남아 있는 몰리브덴은 행성 형성 이후에 외부에서 유입된 물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구팀은 “충돌할 때, 테이아의 핵 속 몰리브덴은 지구 핵과 합쳐졌지만, 테이아 맨틀 물질 일부와 함께 극소량의 몰리브덴이 튕겨 나가 달을 형성하는 재료가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즉, 달 암석에 극히 미세하게 남아 있는 몰리브덴의 동위원소 비율을 분석하면 테이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접근이었습니다.
충돌 이후 지구와 테이아의 파편들이 지구 궤도를 떠도는 모습. 이 파편들이 중력에 의해 뭉쳐져 달이 만들어졌다는 ‘거대 충돌 가설’이 지금까지 가장 신빙성 있는 달의 기원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지=Gemini 생성)
연구팀은 아폴로 임무로 채취한 월석 샘플과 지구 암석, 운석을 대상으로 초고정밀 질량 분석을 수행했습니다. 분석 결과, 달 암석에서 미세하지만 지구 맨틀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몰리브덴 동위원소 특성을 발견했습니다. 수십 년간 지구와 똑같다고 여겨졌던 달에서 마침내 ‘다른 존재’의 흔적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복잡한 계산 모델을 통해 순수한 테이아의 몰리브덴 값을 분리해 낸 결과, 테이아의 동위원소 특징이 태양계 바깥쪽 물질인 탄소질 콘드라이트(carbonaceous chondrite)와는 뚜렷하게 달랐습니다. 대신 지구, 화성 등 태양계 내부 행성들이 가지는 동위원소 범위 안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45억년 전 대충돌 당시, 테이아의 무거운 철 핵은 지구의 핵과 합쳐지면서 대부분의 몰리브덴을 지구 핵 속으로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충격으로 튕겨 나간 테이아의 맨틀 물질과 지구의 맨틀 물질이 뒤섞여 달을 형성하는 고리가 되었고, 이 물질이 중력에 의해 뭉쳐져 지금의 달이 형성되었습니다.
“지구와 테이아는 이웃이었다”
달은 지구와 테이아의 맨틀이 섞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본적인 산소 동위원소 비율은 지구와 흡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연구가 밝혀냈듯, 달의 암석 속에는 테이아의 맨틀에서 유래한 미량의 몰리브덴이 섞여 있었고, 그것이 바로 테이아의 미세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MPS의 티모 홉 박사는 “가장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는 지구와 테이아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소가 태양계 내부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며 지구와 테이아는 이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원시 행성 테이아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 여신(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의 딸)에서 유래합니다. 테이아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밤하늘의 달로 남아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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