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32세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아내 밀레바 마리치 그리고 두 아들, 한스와 에드워드를 데리고 프라하로 이주했습니다.
19세기 후반 프라하는 체코인과 독일인 간 긴장이 높았던 도시로, 행정과 학문, 도시 문화가 오랫동안 독일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카를 대학 또한 독일어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체코 민족부흥운동 이후 체코어의 우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인구와 대학 구성도 체코인 중심으로 바뀌면서 언어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살던 레스니츠가(Lesnická) 7번지 아파트 벽에 걸려있는 그의 흉상. 위의 1910은 아파트의 준공 연도다. (사진=서경주)
독일계는 학문의 수준 유지를 위해 독일어를 고수했고, 체코계는 다수 민족의 언어 반영을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1882년 카를 대학을 독일어 대학과 체코어 대학으로 분리했고, 두 기관은 완전히 독립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1911년 부임한 자리는 이때 분리된 독일 카를-페르디난트 대학의 물리학 교수직이었습니다.
전차 관성 효과서 등가원리 개념 확신
아인슈타인 가족은 스미호프(Smichov) 지역의 새로 지은 아르데코 양식 아파트에 거주했습니다. 이 아파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이어서 최첨단 전기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 정면에는 아인슈타인의 거주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는 아파트에서 팔라츠케호(Palackého) 다리를 건너 비니츠나(Vini?ná) 거리에 있던 카를 대학으로 출근했습니다. 프라하에 체류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전차를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급정거하는 전차에서 느낀 관성 효과가 중력과 가속도의 효과가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는 등가 원리 개념을 더욱 확신하게 한 계기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프라하에서 중력, 열역학, 양자물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11편 이상의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특히 빛의 편향과 중력적 적색편이(gravitational redshift)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제안을 남겼습니다. 1923년 체코어판으로 출간된 상대성 이론(Teorie relativity)서문에서 아인슈타인은 프라하를 자신의 아이디어 발전에 도움을 준 도시로 칭송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이 작은 책에서 상대성 이론의 기본 사상을 담은 글이 이제, 제가 일반 상대성이론의 기본 생각을 차근차근 구체화할 수 있었던 나라의 모국어로 출판되어 매우 기쁩니다. 프라하 독일 대학 이론물리학 연구소 비니츠나 거리의 조용한 방에서 1911년, 등가 원리에 따라 태양 근처 빛이 굴절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프라하의 유대계 지식인들과 교류하던 살롱이 있던 ‘흰 유니콘의 집' 1층에 있는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과 벽면에 붙어 있는 기념 명판. (사진=서경주)
아인슈타인은 프라하 생활을 매우 즐겼습니다. 그는 아파트 창문에서 블타바강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으며, 1902년에 나로드니(Národní)가에 문을 연 카페 루브르(Cafe Louvre)를 자주 들렀습니다. 여기서 그는 종종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노트를 꺼내 연필로 계산에 몰두했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와 넓은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며, 실제로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 초기 계산 중 일부가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 카페 루브르는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명성 때문인지 사람들로 붐벼, 조용히 앉아 복잡한 수식을 계산할 수 있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과학 사상 프라하 시민과 공유
아인슈타인은 1911년부터 1912년까지 프라하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지식인들과 문화적·지적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흰 유니콘의 집(U Bílého jednoroce)’에서는 피아니스트 오틸리 나겔(Ottilie Nagel)의 피아노 반주로 가끔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이 살롱은 철학과 문학 토론이 자주 열리던 유대계 지식인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이 건물에는 그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클레멘티눔에서 학교보다 훨씬 많은 청중을 상대로 이론물리학 공개 강의를 진행하며, 자신의 연구와 과학적 사상을 일반인과 공유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프라하에서 학문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지식을 나누고 교류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프라하에 체류할 당시 즐겨 찾던 카페 루브르 입구에는 그가 1911년에서 1912년 사이 단골손님이었다는 것을 소개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서경주)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프라하 체류는 1년 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프라하를 즐겼지만, 아내 밀레바는 프라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1912년 여름 취리히 공과대학교의 제안을 수락하고 프라하를 떠났습니다. 프라하 이후 아인슈타인의 결혼 생활은 점점 불안정해졌고, 1919년 이혼한 후 조카 엘사와 재혼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프라하를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일부 자료를 보면 그는 프라하를 떠난 지 40년 가까이 지난 1950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자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에게 정치범 밀라다 호라코바(Milada Horáková)의 구명을 청원하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오늘날 프라하에는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단 식당이나 카페는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을 새긴 명판이 세 군데 있으며, 그의 이름을 기리는 아인슈타인가(Einsteinova)도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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