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과학의 도시 프라하를 가다(상)
보헤미아 중심지, 유럽의 심장
과학사에서도 중요 비중 차지
2025-11-19 11:11:08 2025-11-19 15:00:24
보헤미아는 유럽 문화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지역입니다. 역사적으로 게르만, 슬라브,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차하는 다민족·다문화의 공간으로서, 정치·경제의 요충지이자 사상과 예술의 중심 역할을 해왔습니다. 
 
프라하 시내 포호르젤레츠(Poho?elec)에 있는 티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의 동상. (사진=서경주)
 
그래서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던 ‘보헤미안’이라는 용어가 전통적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예술가, 작가, 음악가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단어는 자유롭고 반권위적인 삶과 창조적 정신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는 문화적 상징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중심지이자 중세와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중부유럽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독자적 위상을 유지해 왔습니다. 프라하는 유럽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역사와 낭만이 어우러진 도시입니다.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시가지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천문학의 황금기 - 브라헤와 케플러
 
그러나 프라하는 중세 이후 과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프라하가 과학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은 134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설립한 카를 대학교입니다.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를 대학에서는 중세부터 신학과 철학, 의학, 천문학이 활발히 연구되었고, 지적 토론과 학문의 자유가 존중되는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는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수도로 삼고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와 그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를 초청해 프라하를 천문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살았던 카를로바(Karlova)가 아파트 벽에 붙어있는 그의 명판. 1층에는 그의 이름을 한 카페가 있다. (사진=서경주)
 
1599년부터 1601년까지 프라하에 머문 브라헤는 점성술사들이 황제의 운명을 점치던 시절, 정밀한 천체관측과 데이터 축적을 통해 우주의 운행 원리를 탐구했습니다.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케플러는 이곳에서 행성 관측 데이터 분석과 타원 궤도 법칙을 정립해 1609년 독일에서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을 집필합니다.
 
“나는 신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케플러는, 천체를 정밀하게 관측하며 그 운행 법칙을 신의 섭리가 아니라 수학적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프라하 시절은 과학사에서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시기였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신비나 예언이 아니라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루돌프 2세 시대의 프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수도를 넘어, 실험과 이론이 결합된 ‘과학의 수도’로 변모했습니다. 케플러가 머물던 집은 지금도 프라하 시내 중심부에 ‘케플러 박물관’으로 남아 그의 흔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라하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비엔나와 함께 학문적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카를-페르디난트 대학교와 체코 기술대학교의 설립은 수학, 물리학, 공학 등의 연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이 시기 프라하에서 활동한 대표적 과학자인 크리스티안 도플러와 에른스트 마흐는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410년에 설치되어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프라하 구도심 광장의 천문시계. (사진=서경주)
 
도플러는 프라하에서 파동의 주파수 변화 법칙을 발표해 ‘도플러 효과’의 기초를 세웠으며, 이는 훗날 현대 물리학과 초음파 진단 등 의학 기술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습니다. 마흐는 1867년부터 1895년까지 프라하의 카를-페르디난트 대학교(Karl-Ferdinand University, 지금의 카를 대학교)에서 실험물리학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마흐는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에 비판적이었으며,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개념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향을 주었고,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마흐의 원리(Mach’s Principle)”로 명명했습니다. 프라하에서의 30년 가까운 교수 생활 동안 마흐는 실험 중심의 과학 교육을 발전시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물리학 교육 모델을 만든 인물로 평가됩니다.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공간 
 
프라하 올드타운 광장의 중심에는 1410년 제작된 천문시계가 수백 년 동안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계가 아닙니다. 황도대의 별자리, 달의 위상, 태양의 위치가 동심원 구조로 배치된 거대한 천문도이자 세계관의 축소판입니다.
 
그 시계는 그 당시 시민들에게 ‘우주가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창이자 인간이 우주 질서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를 일깨워주는 철학적 장치였습니다. 수도원과 대학, 성당의 첨탑들은 단지 종교의 상징이 아니라 관측의 도구였습니다. 당시 건축가와 수도사들은 천문학과 수학, 예술을 함께 익혔습니다. 유럽에서 과학이 종교의 그늘 아래 있던 시절, 프라하는 그 두 세계가 가장 밀접하게 만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카를 대학의 도서관이자 천문대로 과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클레멘티눔. 지금은 국립도서관이자 천문박물관이다. (사진=서경주)
 
프라하의 명소인 카를교로 가는 길목에 있는 클레멘티눔(Klementinum)은 16세기 예수회가 세운 교육기관으로 시작해, 대학과 도서관, 천문대 등 다양한 학문 기관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후 프라하 천문대와 과학 연구의 중심으로 성장하며, 체코 과학과 실험적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도서관에 축적된 방대한 과학 문헌과 기록은 학자들에게 귀중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며, 프라하를 중앙유럽 과학 활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프라하=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