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과학을 좀먹는 거대한 그늘
'페이퍼 밀'과 브로커들, 무책임한 저널이 학문 생태계 위협
2025-08-07 08:59:28 2025-08-07 15:07:07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조작된 논문이 검증 없이 유통되는 상황은 과학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논문 철회 및 과학 출판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감시하는 플랫폼인 리트랙션 워치(Retraction Watch)를 설립한 미국의 의사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이반 오란스키(Ivan Oransky)의 말입니다. 
 
최근 호주 시드니대학 의대의 제니퍼 번(Jennifer Byrne) 교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공학 및 응용수학과 리스 리차드슨(Reese Richardson) 박사후과정 연구원 등이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충격적인 논문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문 조작 산업'의 실체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해당 논문은 "조직적 과학 사기를 가능하게 하는 집단은 크고, 회복력이 있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The entities enabling scientific fraud at scale are large, resilient, and growing rapidly)"라는 제목에서부터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종 과학 논문 사기의 주범 '페이퍼 밀'
 
연구팀은 정체를 숨긴 채 대규모로 조작 논문을 생산·판매하는 '페이퍼 밀(Paper Mill)' 산업의 작동 메커니즘을 자세히 추적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개별 과학자가 저지르는 표절이나 데이터 위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름부터 생소한 페이퍼 밀은 일종의 '논문 공장'으로, 실험도 하지 않고 결과도 없이 논문을 만들어낸 뒤, 금전거래를 통해 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줍니다. 
 
논문에 따르면,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실험 데이터, 존재하지 않는 저자, 허구의 분석 등을 조합해 그럴듯한 과학 논문을 양산합니다. 학술지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기획, 작성, 출판을 일괄 서비스로 제공하며 고객은 돈만 지불하면 연구 없이 논문의 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PNAS 논문을 주도한 연구진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발표된 전 세계 생의학 논문을 대상으로 1000개 이상의 '의심 논문'을 분석했습니다. 이 중 상당수에서 동일한 이미지 템플릿의 재사용, 비현실적으로 빠른 연구 수행 시간, 저자 간의 상호 인용 패턴 등이 반복적으로 발견됐습니다. 
 
연구진은 30개 이상의 논문 제조 조직을 식별했고, 이들 대부분은 중국, 러시아, 인도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고객의 국적은 다양했으며, 상당수는 연구 성과에 따른 승진 압박이 높은 개발도상국 출신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일부 조직은 한 해에 수천 편의 논문을 출판하는 놀라운 규모를 보여주었으며, 한 조직은 연간 수익이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대학과 기업 등에서 제한된 연구직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유명 논문의 저자가 되는 것은 진학과 취업뿐 아니라 승진과 연구비 수혜를 위해서도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가 됐습니다. 여기에 과학 저널들은 논문을 많이 출판하면 출판할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심지어 가짜 논문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출판을 위해 과학 저널 편집자에게 뇌물을 준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이 '사기 논문'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기의 네트워크…저널, 편집자, AI, 내부의 침묵과 방관
 
논문 사기의 배후에는 단순한 '작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저널의 편집자나 심사위원이 해당 조직과 결탁한 사례도 밝혀졌으며, 사기 조직은 출판 비용을 더 지불하는 조건으로 논문을 신속하게 게재하는 '우회 채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의 발전도 이들의 전략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논문 본문을 보다 자연스럽고 기술적으로 작성하거나, AI 이미지 생성 도구를 이용해 가짜 실험 이미지도 제작합니다. 심지어 특정 저널이 사용하는 표절 감지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우회하려는 시도도 확인됐습니다. 
 
이러한 조직적 사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 논문이 실제 연구에 인용되며 과학의 발전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물의학 분야에서는 부정확한 논문이 의학적 지침이나 치료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공중 보건의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페이퍼 밀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되는 논문 다수가 PubMed, Web of Science, Google Scholar 같은 주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수백 건의 논문에 인용됐습니다. 
 
사기를 막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감시 체계의 취약성과 학계 내부의 침묵입니다. 다수의 학술지는 심사와 출판 시스템이 영세하거나 외주화돼 있고, 사기를 탐지할 능력이나 자원이 부족합니다. 또한 사기가 밝혀져도 철회(retraction)까지 여러 해가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의적 조작이나 부정은 없었다는 설명을 달았지만 2010년에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된 '인 대신 비소를 사용해 증식할 수 있는 박테리아'라는 논문은 15년 뒤인 올 7월에 철회됐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기관이 '피해자이자 공범'이 되는 상황도 있습니다. 논문 수가 승진, 예산, 평판과 직결되는 구조 속에서, 일부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내부 조사의지를 갖지 않거나 눈감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같은 침묵과 방관이 사기 조직의 생존과 확장을 돕고 있습니다. 
 
이제는 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PNAS에 발표된 논문은 '사기 논문'을 막기 위해 △국제적 데이터 공유 및 감시 체계 구축 △논문 철회 절차의 자동화 및 빠른 처리 시스템 도입 △연구자의 윤리 교육 강화 및 실적 중심 평가제도 개선 △논문 수 중심의 평가가 아니라 질 중심의 전환 필요 △연구비 수혜 조건과 논문 성과의 분리 △AI 기반 사기 탐지 도구 개발 및 학술지 심사 구조 개선 등의 대책을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논문이 발표될 때마다 다른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탐구하고 자신은 거기서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지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그것은 과학의 효율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선행 연구를 신뢰하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구가 조작된다면 그것은 과학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사기 논문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 일탈로 치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PNAS 논문은 과학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중대한 범죄를 폭로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의 교신저자 중 한 사람인 루이스 아마랄(Luis Amaral) 노스웨스턴대학 교수는 "이런 추세를 막지 못하면 과학은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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