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노동대상' 수상 정귀순…"사람 지키지 않는 운동엔 미래 없어"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됐다…배웠던 모든 게 뒤집혔다"
"미싱대 앞 10대 여공이 사라진 자리…이주노동자가 있었다"
산업연수생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근로기준법 적용' 초점
2025-07-22 06:00:00 2025-07-22 06:00:00
정귀선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이사장. (사진= 본인 제공)
 
[뉴스토마토 김태은 기자] "월급을 못 받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1996년 어느 일요일, 부산 중앙성당. 정귀순씨(현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이사장)가 당시 미사를 마친 한 필리핀 노동자에게 '한국 생활은 어떠냐'는 질문을 하자 돌아온 첫마디였습니다. 이어 "그 친구의 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고, 회사를 찾아가게 된 게 제 첫 상담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 이사장은 지난 19일 <뉴스토마토>와의 서면·전화 인터뷰에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같이 회고했습니다. 이후 그는 30여년 간 지역에서 이주·여성·해고 노동자 등 취약 노동 계층을 위한 권익 보호와 정책 제안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은 지난 16일 정 이사장을 '2025 한국노동대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심사위원단은 "정 이사장의 활동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 지역 인권운동의 구조적 기반을 만들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외연 확장과 방향성 설정에 있어 귀감이 될 만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정 이사장은 수상 소감에서 "미싱대 앞에서 졸고 있던 10대 여공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참혹한 노동 현실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만 바뀌어 국적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다. 제 젊은 날이 와르르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주노동자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밝혔습니다. 
 
정 이사장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1996년 부산 최초의 외국인노동자 인권단체 '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현 (사)이주민과함께)'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인권운동에 나섰습니다. 이후 2003년 이주민들이 떠나온 본국으로 시야를 확장해 '아시아평화인권연대'를 설립하고, 캄보디아·베트남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2004년부터는 '민들레 기금'을 운영하며 지역 활동가의 국내외 연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 이사장은 '사람을 지키지 않는 운동에는 미래가 없다'는 문제의식을 확립했고, 2022년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이 출범했습니다. 정 이사장에게 그간의 여정을 들어봤습니다. 다음은 일문일답입니다. 
 
노동 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무엇인가. 
 
"1979년 대학(부산대)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교내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굳게 닫힌 정문 옆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세상 속으로 나아갔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됐다. 그 광경을 보고 그동안 제가 배웠던 모든 것들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수많은 질문이 생겼고 소위 금서로 분류된 책들을 읽으며 청년 전태일을 알게 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기계에 갈려 나가는 삶을 살고 있던 한국 노동자들을 알게 됐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면서 이들을 외면하고 대학을 졸업해 '적당히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위선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영화 <변호인>에 소개된 '부림사건'으로 구속되며 짧은 대학생활은 끝이 나고,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현장에서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자들 스스로 현장을 바꾸는 운동이 궤도에 올랐을 때, 가장 취약한 노동자인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왜 '이주노동자'였나. 
 
"1996년 당시 한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도 만들고, 지역에도 노동 관련 단체들이 꽤 많아졌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직 비어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고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비정규직 노동자, 다른 하나는 막 소개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였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는데,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접할 기회가 잘 없었다.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수소문했고, 처음 만난 곳이 부산 중앙성당이었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매주 일요일 미사가 끝나고 성당 지하의 넓은 홀에서 모여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는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가서 한 필리핀 노동자에게 '한국에서 일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사실 속으로는  '이런저런 점이 좋다'는 답을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제일 처음 들은 대답이 "제가 월급을 못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였다. 회사 사장은 제게 '한국 사람이 왜 한국인 편을 안 들고 외국인 편을 드냐'고 욕을 퍼부었다. 그 친구의 체불 임금을 받아낸 뒤, 상담 요청이 쏟아졌다." 
 
사무실을 차리고, 명함을 만들어 정식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나.
 
"(이주노동자) 상황을 좀 알아보자고 시작한 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상담을 해야하는 상황으로 바뀐거다. 사장이 '넌 뭐냐'라고 물었을 때 '친구예요'라고 답하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단체도 만들고, 전화번호도 만들었다. 아픈 이주노동자를 위해 의사들을 만나고, 보상금이나 임금체불이 길어지면 변호사를 찾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그런 인연으로 우리 단체의 자문위원을 맡아주셨던 거다." 
 
당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체류 자격이 불안정하다 보니, 상담을 안전하게 진행하는 것이 굉장히 큰 어려움이었다. 근로감독관을 만나러 간 사이에 출입국 관리사무소에서 와서 (이주노동자를) 잡아가는 일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 일을 깊이, 오랫동안 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주노동자와 함께한 경험 중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은 언제였나. 
 
"한국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을 그들의 고향과 가족 속에서 다시 만났을 때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그들은 고향의 가족에게는 한국이라는 선진국에서 일하는 자랑스러운 존재인데, 정작 그가 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반밖에, 아니 반도 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꿈을 안고 한국에 왔는지, 한국에서 무엇을 키워가고 싶은지... 모른다. 이주민을 고향에서 봤기 때문에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5년 베트남 장학사업 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정귀순 '파랑' 이사장. (사진=본인 제공)
 
30여 년간 현장에서 제도 개선 활동을 이어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
 
"한국의 3D 업종에서 더 이상 사람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력 도입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외국인력제도는 '노동자'가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의 편법으로 출발했다. 이를 바로잡는 데 엄청난 고통과 노력이 필요했다. '연수생'이기 때문에 한 달에 5만원에서 15만원의 임금을 받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하루 14~16시간씩 다림질 등 똑같은 일만 했다. 그게 어떻게 기술을 배우는 것인가. 2001년, 3년간 산업연수생으로 일한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닌 단순노동자로 일했음을 입증하고 처음으로 퇴직금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 판결은 모든 산업연수생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줬고, 동시에 산업연수제도를 아래에서부터 무너뜨린 첫 사례였다. 사건의 주인공인 '미네르바 푸욕'씨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산업연수제도는 몇 년 더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산업연수생 제도를 고용허가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제일 중요한 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에게 있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다. 임금, 노동시간, 휴가 등에서 기준법보다 더 잘해주는 건 괜찮아도 이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기준이 근로기준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을 지원을 하는 전국의 단체들이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를 구성해서 (협의회) 차원의 농성,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와 면담도 했다." 
 
이주노동자 관련 법·제도 개선 과정에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국민국가라는 관점이다.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상소감에서도 말씀드렸듯, 이번 전국민 민생회복 지원금을 두고 이주민은 배제하자는 차별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과정에서도 이주민들은 고르게 지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질문하고 싶다. 한국에서, 우리의 이웃으로, 학교와 일터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을 교육, 취업, 복지의 기회에서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왜 필요하나. 아니 한국사회에 어떤 이익이 되나. 단순노동 인력은 정주를 제한하고, 전문인력은 유치하겠다는 노동력 중심의 관점에 머무르고 있는 거다. 한국사회는 지난해 합계출생률 0.75을 기록했다. 한참 전부터 이민사회로 가고 있는데 제도와 인식은 전혀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새 정부는 이민사회로서의 명확한 인식과 정책으로 나아가야 왜곡된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인권플랫폼 '파랑'은 어떤 단체인가. 
 
"파랑은 '파이프라인' 같은 곳이다. 활동가, 연구자, 다양한 자원들이 모일 수 있는 플랫폼을 구상했다. '파랑'의 역할은 여러 단체와 이슈, 사람을 모으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내에서도 여성·장애인·이주민 운동 등 각자가 활동을 하고 있고, 하나의 인권 운동으로 묶이기는 쉽지 않다. 개별 활동가들도 자기 일에 고립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활동가들이 같이 모여 서로 연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있는 연구자들도 인권에 관심을 가질 때 접근할 수 있는 혹은 함께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지 않나. 한달에 한 번씩 연구 조사를 꾸준히 하고 있고, 인권 아카데미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부산 지역 인권운동 세미나를 달에 한 번씩 하고 있다."
 
'파랑'이 가장 주목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파랑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사람’이다. 첫 번째 사람은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 인권활동가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들이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그의 활동 부문에서 전문가로 성장하며 오래 활동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원하고자 한다. 두 번째 사람은 인권활동가들이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다. 인권현장을 새롭게 발굴하고 그 현장에 빛을 비추어 사회적 관심을 갖고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인권활동가와 인권현장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인 지지그룹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즉, 인권에 관심을 가진 시민, 인권의제를 다루고자 하는 연구자 그룹, 내가 가진 자원이나 재원을 의미있는 곳에 지원하고자 하는 후원그룹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활동가와 인권현장을 지원할 수 있다. 사람을 지키지 않는 운동에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지역에서 인권 활동가로 활동하는 것은 어떤가.  
 
"중앙정부 또는 지자체와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예산 규모 차이가 훨씬 크다. 서울시 또는 경기도 안양시, 수원시 등 인권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자체는 현장의 경험이 행정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진행하는 사업이 훨씬 많다. 제가 부산시 인권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부산광역시 인권센터가 만들어졌지만, 3년 운영을 마치고 2기를 출범할 때 인권센터 수탁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 아름다운 재단, 루트 임팩트, 브라이드 임팩트 등 여러가지 활동에 크게 지원하는 민간 기금 혹은 단체도 서울에 있다. 기본적으로 정보와 관계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지역에서는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을 알아보거나 활동을 소개할 관계를 형성하는 일 등이 쉽지 않다. 연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에 연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 지역에는 연구 프로젝트가 굉장히 적어서 연구자들이 중앙의 프로젝트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기회가 없다. 활동 및 연구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기반이 취약하다. 정보나 자원의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부산이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도 그런 것인지.
 
"부산이 이정도니 다른 지자체는 말할 필요가 없다. 부산에서 시도해보고 싶어도 도저히 안 되면 활동가들이 서울로 떠나는 일도 생긴다."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지역 인권활동가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 
 
"2022년 진행한 <부산지역 인권단체 및 활동가 현황조사>에서 '나를 활동가로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활동가들은 이렇게 답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활동가로서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었을 때,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던 현실이 우리의 활동에 의해 변화해 가는 것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나를 버티고 성장하게 하는 동료의 존재와 '나라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라는 책임감으로 견디기도 한다. 즉,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의 경험과 활동가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활동을 이어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 생각한다."
 
현장에서 활동하며 보기에 한국 사회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다. 현재 한국은 일터의 안전시설을 제대로 갖추는 것보다 사람의 목숨값과 벌금을 내는 것이 더 이익이라 여기는 기업의 계산이 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순위는 정규직, 비정규직, 그 아래 이주노동자가 위치한다. 그래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이주노동자에게 주어진다. 게다가 언어의 문제로 작업 현장에서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에 더 위험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주노동자에게도 안전교육, 작업도구 지급, 휴식시간 보장 등 내국인 노동자와 같은 조건의 환경이 보장돼야 한다. 최근 노동조합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작업중지권(위험이 확인될 때 작업을 멈출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다."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지 못한 활동이 있나. 
 
"한국에서 활동하던 이주민 활동가 중 본국에 돌아가 이곳에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이들이 꽤 있다. 그들이 개별화되는 게 아닌 '아시아'라는 틀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네트워크나 포럼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아시아의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경험한 이들을 본국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가는 장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다음 세대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12·3 비상계엄 이후 새로운 힘인 청년들이 광장에서 높이 든 수많은 깃발들을 봤다. 그 깃발 하나하나가 모두 인권 의제들이기도 했다. 그것들이 일상에서 실현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힘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파랑'도 플랫폼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싶다."
 
정귀순 '파랑' 이사장이 활동가들과 함께 이주민과 함께 22주년 송년의 밤 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김태은 기자 xxt19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