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보이지 않는 마음의 흔적을 찾아 복원하기
인지화석 연구, AI와 빅데이터로 인간의 마음을 읽다
2025-07-07 08:53:25 2025-07-07 14:37:46
르누아르의 1881년 그림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Le Déjeuner des canotiers)>은 벨-에포크 시대, 문화예술의 중심지 파리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AI는 방대한 양의 책, 회화, 음악, 기타 예술 형식의 데이터를 탐색해 옛 사람들의 심리와 사고방식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시간은 허무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화석, 유물과 유적, 문헌은 시간의 물리적 흔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부분 문자 기록과 물리적 유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특정 시대에 살았던 인간이 느꼈던 감정과 정서, 사회 분위기, 사고방식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은 그 흔적을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근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이런 ‘보이지 않는 흔적’을 추적하려는 새로운 학문 영역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로 ‘인지화석(cognitive fossils)’ 연구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남긴 흔적들
 
인지화석 분석은 과거 사람들의 심리, 감정, 가치관, 사고방식 등이 반영된 문화적 산물을 통해 당시 인간 집단의 심성을 추론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고생물학자들이 물리적 화석을 분석하듯 인지화석 연구자들은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종교 등 문화 전반에 나타난 정서적 패턴을 연구 대상으로 삼습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의 에드워드 슬링어랜드(Edward Slingerland) 교수는 고대 중국 문헌을 기반으로 ‘마음’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대규모 문헌 데이터베이스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의 연구팀은 기원전 221년 이전에 작성된 문헌 600편 이상에서 ‘마음(心)’의 용례를 조사했고, 고대 중국인들이 ‘마음’과 ‘몸’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오랜 인문학적 논쟁을 디지털 분석으로 해결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그림 속에도 감정의 흔적이 있다면
 
문자 기록뿐 아니라 회화와 같은 시각예술도 인지화석의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토론토대학교의 경제학자 슈테판 헤블리히(Stephan Heblich) 교수팀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제작된 63만여점의 회화를 AI로 분석하여, 그림 속 감정의 시계열 변화(時系列變化)를 추적했습니다. 
 
연구팀은 먼저 전문가 20명이 8만점 이상의 회화에 나타난 감정을 9가지 범주(기쁨, 슬픔, 공포, 혐오 등)로 분류했습니다. 이후 이를 학습한 AI가 나머지 수십만점의 그림 속 감정을 자동으로 판별하도록 설계했습니다. 
 
흥미롭게도 AI는 선과 질감 같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서 무기, 얼굴 표정, 배경 등 정서적으로 유의미한 요소들을 중심으로 감정을 예측했으며, 이는 인간이 그림을 읽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연구팀은 소빙기(Little Ice Age)였던 1500~1700년 동안 기온이 하강함에 따라 공포와 슬픔의 표현이 증가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독일의 경우 1850년경 긍정 감정의 표현이 정점에 달한 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까지 감소세를 보였다는 경향도 포착했습니다. 
 
1774년 라이프찌히에서 출판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초판본 속표지. 사랑에 대한 강렬한 감정, 고독,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청년 베르테르의 시점으로 섬세하게 서술한 이 소설에는 산업혁명 이후 사랑을 삶의 본질로 인식하는 낭만주의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랑은 언제부터 소설의 주제가 되었을까?
 
낭만적 사랑이 문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이 주제를 중심에 둔 최초의 소설로 널리 인정받는 작품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프랑스의 연구 중심 대학인 파리과학인문대학(Paris Sciences et Lettres University)의 니콜라 보마르드(Nicolas Baumard) 교수팀은 위키피디아에 등록된 약 3800년간의 문학작품 요약 데이터를 수집해, ‘사랑’, ‘상사병’, ‘비련의 연인’ 같은 표현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낭만적 사랑의 표현 빈도는 1760년경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경제 성장과 함께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인간이 생존을 넘어 자아실현과 정서적 충족을 추구하게 되면서 문학의 주제 역시 확장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결과로 해석됩니다. 
 
AI의 등장이 인문학 논쟁의 종언을 가져올까?
 
물론 모든 연구가 성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2019년,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된 한 논문은 ‘도덕적 신(선과 악을 판단하고 보상·처벌하는 신)’의 개념이 복잡한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생겨났다고 주장해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곧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슬링어랜드 교수는 이 연구가 종교사에 익숙하지 않은 조교들을 코딩 작업에 참여시켜 오류를 유발했으며, 일부 지역의 소수설을 과도하게 대표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사례는 AI 분석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가의 맥락 이해와 비판적 해석이 병행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AI는 가설을 생성하고 데이터를 탐색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인간 심리와 정서의 변화를 정확히 해석하려면 단순한 계산을 넘어선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합니다. 
 
빅데이터로 읽는 인간의 마음
 
인지화석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 이미지, 음악, 신화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집적해 빅데이터화하고, 이를 AI로 분석하여 정량적 패턴을 추출하려는 시도는 점점 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부 엘리트나 특정 집단만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역사 해석에서 편향이 발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더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인간 이해의 틀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링어랜드 교수는 “인문학자들은 종종 반복되는 논쟁에 갇히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논쟁을 정리하고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류의 정신사를 다시 쓰기 위한 혁신적 도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AI와 빅데이터가 사라진 인간의 마음을 어디까지 복원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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