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TV를 보는 중년의 모습을 그린 챗GPT 이미지.
[뉴스토마토 임삼진 기자] 며칠 전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에는 눈에 띄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라이프스타일 분야에 게재된 이 글의 도발적인 제목은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고 있다는 7가지 신호들(Seven signs you’re turning into your dad)’입니다. 이 칼럼을 쓴 조지 체스터턴(George Chesterton)은 텔레그래프의 선임 기획기사 필자(Senior Features Writer)로 다양한 주제의 피처 기사를 왕성하게 쓰고 있습니다. 과거 이브닝 스탠다드(Evening Standard)나 가디언(The Guardian) 등의 주요 매체에서도 편집자와 칼럼니스트로 활약한 바 있는 그는 이 글에서 중년 남성이 아버지로 변해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고 통찰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의 부제는 ‘현대 팝 음악의 소리에 움찔거리기 시작하면, 아버지의 유전자가 우리를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중년 남성이라면 누구나 ‘내 얘긴가?’ 생각하게 하는 문구입니다. 이 칼럼에서는 영국의 중년 남성이라면 공감할 만한 여러 TV 프로그램이나 음악 등 여러 사례가 소개되어 있지만 우리의 느낄 정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의 TV 시청 블랙홀은 ‘빈티지 자동차에 관한 모든 것’이라며 "휠러딜러(Wheeler Dealers,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 중인 자동차 리얼리티 쇼)에서 채널을 돌리려다 낡은 랜드로버가 정비소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면 채널을 바꿀 수 없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이 경우 ‘채널을 돌리다가 <나는 자연인이다>를 만나면 채널 고정이 됩니다’ 정도로 이해하면 우리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지 체스터턴이 말하는 7가지가 궁급합니다.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모습들
첫째, 거울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50대 초반쯤 이르면 자신의 모습에서 낯설기 만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 심지어 친척들로부터 "아버지랑 똑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아버지로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둘째, 어느 순간부터 ‘아빠 TV’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재 TV’에 빠지는 것이죠. 고향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과거 아버지가 즐겨보던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취향을 닮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셋째, 자신이 좋아했던 시대를 역대 최고의 시대라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황금기를 그리워하며 회상했던 것처럼 자신도 1980년대나 90년대를 이상적으로 추억하며 미화하게 됩니다.
넷째, 음모론에 점점 끌리기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황당한 소문이나 음모론을 믿으며 이야기했던 모습을 이제 자신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여러 음모론이 횡행한 적이 있는데 영국도 비슷한 듯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점차 아버지를 닮아가는 신호입니다.
다섯째, TV에 대꾸하기 시작합니다. 텔레비전 속 뉴스 앵커 멘트나 광고의 내레이션에 혼자 말을 건네는 행동은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 소통 욕구가 커졌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종종 하던 행동 중 하나입니다.
여섯째, 새로운 음악을 듣기 어려워집니다. 젊은 세대의 음악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과거 자신이 아버지의 음악 취향을 조롱했던 모습이 재현됩니다. 결국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와 같은 편협함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아버지와 비슷한 실랑이를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잔소리하거나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는 등 과거 아버지와의 갈등을 이제 자신이 자녀와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우연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공명’ 현상
이러한 변화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심리학에는 ‘역할 동일시(role identification)’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게 되고, 특히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자기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변화가 나타나며, 그 결과 행동뿐 아니라 취향과 관심사, 미디어 소비 습관까지도 점차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중년이 되면 누구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이때 어릴 적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던 요소들, 특히 아버지와 연결된 기억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현재의 취향과 일상 속에 스며듭니다. 고향 이야기나 역사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기억 속 배경음악처럼 우리의 감정과 공명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공명(cultural resonance)’이라 부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전 세대가 즐겼던 콘텐츠와 감성이 시간이 지나 다음 세대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오며, 정서적 유산이 조용히 전승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이러한 흐름은 설명됩니다. 중년 이후 인간의 뇌는 자극적이고 급변하는 정보보다는 안정적이고 내러티브 중심의 콘텐츠를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단지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신경학적 구조의 변화와 인지적 안정감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조지 체스터턴은 이러한 현상들을 ‘아버지로 변모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정의합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좋은 면을 계승할 것을 권합니다. 결국 “아이가 남자를 아버지로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시키며,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결국 앞서 언급된 여러 변화들은 단순한 ‘나이 듦’의 증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정서적 다리를 건너는 과정이며, 그 안에는 가족과 정체성, 기억과 세대, 문화적 유산과 생물학적 흐름이 어우러진 복합적 심리 구조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문화의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꽤 의미 있는 흐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전승의 흐름 속에서도 지나치게 음모론이나 편협함에 현혹되지 않는 분별력일 것입니다. 그런 분별력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전해진 감성과 지혜를 더욱 넉넉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서의 계승이며 문화와 삶을 잇는 조용한 울림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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