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 요즘 국내 영화 시장이 그렇습니다
. 호랑이가 주춤한 사이 여우가 숲의 왕좌를 넘보며 부쩍 성장했습니다
. 국내 영화시장 공룡으로 불리는
CJ ENM(035760)과 롯데컬처웍스가 주춤하는 동안
쇼박스(086980)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가 각각
1000만 영화를 선보이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
‘힘 빠진’ 1등과 2등
작년 한 해는 CJ ENM에겐 ‘우울’했고, 롯데컬처웍스에겐 ‘한 방’이 부족했습니다. 먼저 업계 1위 CJ ENM에서 투자 배급한 한국 영화 5편, 모두 흥행 참패했습니다. ‘유령’ ‘카운트’ ‘소년들’이 100만명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280억원을 쏟아 부은 ‘더 문’은 손익분기점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51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습니다. 작년 연말 개봉한 ‘외계+인 2부’도 143만명으로 성적을 마무리하며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잇따른 흥행 참패는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작년 1월 10만원대로 시작한 CJ ENM 주가는 여름 성수기 시즌 이후 5만원대로 추락했고 현재는 7만원 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고전 중입니다. 1년 만의 변화입니다.
업계 2위 롯데컬처웍스는 약진했지만 한 방이 부족했습니다. 여름 시즌 개봉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384만명을 동원하며 체면을 치렀지만 190억원의 제작비와 이병헌이란 흥행 카드를 내세운 결과치고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오히려 추석 시즌 개봉한 ‘잠’이 146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연말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도 ‘이순신 3부작’ 가운데 유일하게 500만명을 못 넘는 실질적인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영화계 관계자는 “영화 산업 자체가 강한 ‘리스크’ 산업이다 보니 거대 자본이 들어갈수록 리스크는 커지게 마련이다”면서 “’코로나19’ 이후 개봉이 밀린 라인업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시장 트렌드가 바뀌면서 유독 두 회사의 타격이 커진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회사의 타격이 컸던 이유는 거대 자본을 집중시킨 대작 위주 생산 방식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신작 영화 개봉이 뒤로 밀리고, 이 과정에서 관객은 OTT로 발길을 돌렸는데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봉까지 밀리면서 투자금이 묶이고 시장 트랜드까지 변하는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배급 공룡들은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집중도를 높였고, 결국 흥행 실패가 나오면서 타격이 컸다는 진단입니다.
여우의 꾀가 승리했다
업계 1,2위가 휘청이는 동안 후발주자인 쇼박스, 플러스엠은 1000만 영화를 선보이며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는 메가박스 계열 투자 배급사이지만, 채 1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경력 탓에 그동안 논외 대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랬던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가 누적 관객 수 1312만명을 동원한 ‘서울의 봄’으로 업계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한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상업 영화 매커니즘에서 본다면 12.12 신군부 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은 투자 결정을 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면서 “플러스엠의 선구안이 기가 막혔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만든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의 프로듀싱 능력, 김성수 감독의 연출력과 시나리오 완성도, 황정민 정우성 등의 티켓 파워가 ‘내용의 리스크’를 넘어설 수 있다고 판단한 플러스엠의 판단력이 탁월했다는 겁니다.
쇼박스 역시 ‘파묘’로 국내 영화 시장 투자 배급 빅데이터를 모두 깨버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파묘’는 13일 기준 841만 관객을 넘어섰지만 사전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어 3월 셋째 주말을 넘기면 1000만 관객을 넘어설 듯합니다.
‘파묘’ 장르는 오컬트로, 공포 장르 하위 개념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파묘’는 올 여름 개봉작이 돼야 했습니다. 여름에 배급하는 타깃형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쇼박스는 이런 기존 공식을 파괴했습니다. 이현정 쇼박스 영화사업본부장은 “’파묘’의 타깃층으로 1020세대를 노렸고 그들의 입소문을 기대했기에 2월 말과 3월 초 개강 및 개학 시기를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적중했습니다. 140억원이 투입된 대작 영화가 국내 영화 시장 비수기를 성수기로 바꿔버린 배급 전략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겁니다.
국내 한 투자 배급사 관계자는 “’서울의 봄’과 ‘파묘’ 흥행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 “소재와 시기가 국내 상업 영화 시장에서 무의미해 졌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영화 산업은 기존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산업을 얼어붙게 만들던 ‘코로나19’가 끝나고 극장가의 관객 회복이 본격화하는 지금, 투자배급 호랑이와 여우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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