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2008년, 나는 한국을 은퇴했다. 라오스에서 변변한 사업이나 직업은 고사하고 생업에 허덕이고 있는 푼수여서 호기나 부려보는 흰소리이지만 마냥 근거 없는 헛소리만은 아니다. 인도차이나 생활 17년, 라오스에서만 14년이 됐으니,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은 가뭇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내게 남은 향수병의 근원은 불현듯 떠오르는 한국 음식들이다.
밥과 반찬 몇 가지 두고 한 끼 때우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 국을 떠먹어야 밥이 넘어가는 구식 입맛을 유지하고 있다. 국이나 찌개, 탕이 없으면 밥을 물에라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라오인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 있다. 라오스에서 이렇게 한다면 몽족이다. 고산에서 부식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는 처지가 딱한 사람들. 라오인이 한국을 비교할 수 없는 선진국이고 부자 나라로 알고 있는데, 몽족처럼 한국인이 밥을 물에 말고 있으면 얼마나 체신 없어 보이겠는가. 그러니 입맛 없으면 먼저 고려하는 게 외식이고 첫 번째 선택은 국수로 한 끼 때우는 것이다.
1. 국수 두 그릇으로 남은 베트남 여행
2023년 한 달간 베트남 북단을 여행했다. 따이인이 라오스 태국 미얀마로 들어오기 전 거쳤을 루트를 역순으로 밟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라오까이성 싸빠, 옌바이성 무깡짜이, 하장, 까오방, 랑선을 거쳐 하롱베이로 들어갔다. 하롱베이에서 추억으로 남은 것은 국수 두 그릇. 산책하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베트남 국수 ‘퍼’. 한 달간 입에 맞지 않은 음식들로 주렸던 배을 해갈했다. 한 번으론 부족해 이틀간 밑바닥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해치우고 완전한 해장을 했다. 여독까지 가시는 듯했다. 하노이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들려 먹었다는 ‘짜’도 맛있었지만, 뼈를 우린 육수에 담긴 국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라오스 칼국수-카오 삐약 쎈. (사진=제국몽)
2. 국수 천국
깊은 맛 육수에 말린 국수는 내게 소울푸드와 같다. 국이 있어야 숟가락을 뜨는 보수적인 입맛을 가진 내가 외국에 산다고 일용할 양식을 라오식으로 하는 건 아니다. 어설픈 한식을 먹고 산다. 김치는 속이 덜 찬 배추를 써야 하고, 깍두기도 살짝 바람든 무 같아 맛도 덜하고 무엇보다 시원하고 아삭한 식감이 아쉽다. 차라리 덜익은 파파야를 채소로 써서 채를 만들면 먹을 만하다.
국수의 원조라 주장하는 중국이나 이탈리아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내게 라오스는 '국수 천국'이다. 칼국수, 된장국수, 내장국수, 도가니국수, 볶음국수 등 다양한 국수가 있다. 국수 재료도 다양하다. 찹쌀, 쌀, 타피오카 전분, 밀 등이 쓰인다. 라오스 밀 자급률은 2023년에 2%였다. 이것도 2020년 0.5%에서 4배 정도 증가한 것이다. 과거 한국에서 밀보다 보리가 2모작 곡물로 선호됐던 건 밀에 비해 보리를 10일 정도 빨리 벨 수 있는 기후적 요인 때문이었다. 라오스에서 이론상으로 벼는 3기작 이상 할 수 있다. 국수의 주재료가 쌀과 찹쌀이 된 건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다. 라오스 고유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쌀국수 세 종류를 소개한다.
- 카오 삐약 쎈
카오 삐약 쎈은 라오스의 칼국수라 할 만하다. ‘카오’는 쌀, ‘삐약’은 젖었다는 뜻이고, ‘쎈’은 긴 선 모양을 말한다. 이 '육수에 젖은 국수'는 찹쌀과 타피오카 전분을 배합해 반죽한다. 면발 굵기는 식당마다 다르고, 먹는 사람 취향을 고려해 얇은 면과 두꺼운 면 두 가지로 만들기도 한다. 얇은 면도 우리가 생각하는 국수보다 훨씬 두껍다. 시장에서 면만 따로 팔아서 취향껏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찹쌀과 전분을 배합해 눌러 만든 국수라서 면발이 쫀득하면서 탄력이 있고 씹는 맛이 있다.
육수는 소, 돼지, 닭뼈를 우려내 만드는데 이 뼈들의 배합 비율이 칼국숫집 개성이다. 유명하고 맛있는 집 특징은 뼈에 붙었던 도가니와 수육을 함께 판다.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고 골수까지 파먹으라고 칼과 포크, 아예 빨대까지 주는 집도 있다. 한국 여행자들에게 유명해진 위양짠 복판 씨홈 지역 국숫집은 '도가니국수'란 이름으로 카오 삐약 쎈과 베트남식 국수 퍼, 도가니 수육을 팔아 인기를 끌고 있다.
육수가 진국이 아니면 면을 육수와 같이 끓이는 경향이 있고, 잘 고아진 육수를 쓰는 집은 식탁에 내오기 전 바로 말아서 준다. 보통 고명은 소, 돼지, 닭고기 조각을 선택할 수 있다. 라오인도 선지를 먹는다. 선지 조각을 고명으로 올려주는 경우도 흔하다. 씹는 맛을 좋아하는 나는 돼지고기를 바삭하게 튀긴 ‘무꼽’을 선호한다.
양념은 직접 해야 한다. 그래서 라오스 식탁에는 양념통이 많다. 어간장, 고춧가루, 고추기름, 케첩 같아 보이는 고추 소스와 생고추, 그리고 피클, 후추, 마늘, 샬럿 가루 등.
채소도 한 접시 준다. 한국인들에게 선호가 분명한 고수, 민트, 깻잎처럼 생긴 보라색 차조기잎, 줄기콩, 라임 레몬 조각, 잘게 썬 양배추. 녹두를 길러 익히지 않은 숙주는 다른 채소와 섞지 않고 따로 한 접시 준다. 재료만으로도 맛이 없을 수 없는 훌륭한 칼국수다.
라오스 된장 국수 카오 쏘이와 도가니 수육. (사진=제국몽)
- 카오 쏘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루왕파방 지역에서 인기 있는 '된장국수'다. 이 국수는 사실 라오스 북단 루왕남타주 무앙씽군에서 남진을 해 전국으로 퍼졌다. 카오 쏘이도 라오스에서 맛볼 수 있는 고유한 국수로 넓고 납작한 모양이다. 카오 삐약 쎈과 비슷하지만 전분을 쓰지 않아 면발에 찰기는 없다. 결정적 차이는 국물 맛을 내는 소스가 된장과 비슷한 콩 발효 양념이고, 여기에 민물 젓갈을 배합해서 쓴다. 태국 치앙마이에도 카오 쏘이가 있으나 큰 차이가 있다. 태국 카오 쏘이는 면을 튀겨 쓰고 육수는 코코넛밀크와 진한 커리를 섞는다. 양념과 채소는 카오 삐약 쎈과 거의 같다. 한국인에게는 라오스 북부 국수 카오 쏘이가 구수하게 느껴질 것이다. 국수 귀신인 나는 이 국수도 좋아한다.
- 카오 뿐
가늘고 둥근 면을 사용한다.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두께의 국수고, 발효시킨 쌀로 만든다. 육수는 코코넛 밀크와 커리를 배합한다. 국물에 민물돔 살을 으깨어 걸쭉하게 만들기도 한다. 카오 뿐 중에 소와 돼지 내장을 순댓집처럼 손님이 원하는 부위를 잘라 고명으로 넣어주는 '내장국수'도 있다. 육수에 레몬그라스, 생강 맛이 나는 갈랑갈, 마늘, 샬럿을 넣어 내장의 잡내를 잡는다.
3. 설탕과 MSG를 좋아하는 라오인
라오인 식습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게 설탕과 MSG 사용량이다. 식당에서는 이 두 가지를 갠 양념을 국자 단위로 퍼 넣는다. 라오인이 국을 떠먹는 오목한 숟가락으로 듬뿍 퍼 육수에 넣고 또 넣는다. 라오인 가사도우미나 주방 담당들에게 아무리 MSG와 설탕 사용을 하지 말라고 해도 몰래 넣는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 방문자들에게 식당에서 활용할 수 있는 라오어 세 가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고수를 싫어한다면 “버 싸이 험뻠 더~”, '고수 쓰지 말아주세요'라는 뜻이다. '설탕을 넣지 말아주세요'는 “버 싸이 남딴 더~”, 'MSG 사용하지 말아주세요'는 “버 싸이 뺑누와 더~”라고 말하면 된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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