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찰밥을 찌는 모습. (사진=우희철 작가)
1. 찹쌀의 자식들
라오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을 할 것이다. “룩 카오 니야우.” '찹쌀의 자식들'이라는 뜻이다. 라오스만이 유일하게 찰밥을 주식으로 삼는다. 라오스에서 찹쌀이 아닌 곡물을 주식으로 한다면 주류 라오족이 아닌 소수민족이거나 외국인이다.
한국인은 안남미를 찰기가 없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힘이 없는 쌀로 여기고 좋아하지 않았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중국인들은 우리와 반대로 자포니카쌀을 선호하지 않았다. 자포니카 계열 쌀이나 찹쌀은 찰기가 져서 기름에 볶으면 떡이 지는 불편함이 따른다.
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찹쌀을 주식으로 삼을 일이지, 명절이나 잔칫날 떡과 술을 만들고 식혜 같은 별식을 만드는 데 그쳤을까. 조선시대까지 찹쌀은 고사하고 쌀도 잡곡과 바꾸어 식구들 끼니를 이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다. 쌀의 세계 평균 수확량은 헥타르당 4.7톤인데, 찹쌀 수확량은 헥타르당 2.3톤 정도로 쌀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구압’과 식량난으로 고통받던 한반도 주민은 선호를 희생하고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찹쌀은 멥쌀의 돌연변이다. 4000여년 전 인도차이나 북부 고지대에서 멥쌀에 들어 있는 푸슬푸슬한 20~25% 전분을 형성하는 효소에 방해를 주는 유전자 변이가 발생하면서 찹쌀이 탄생했다. 찹쌀벼는 유전적 열성으로 찰기를 좋아하는 농경민이 집단적으로 재배해주지 않으면 멥쌀벼로 돌아가게 돼 있다. 일반벼가 자라는 논들에 찰벼 논이 ‘뉘’처럼 섞여 있다면 그 논은 일반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찰벼 농사꾼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게 되므로 라오인 형성과 정체성에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라오인은 멥쌀은 모내기가 필요한 논에서 거의 재배하지 않고 밭에서 자라게 한다.
2. 찹쌀과 라오인
찰밥을 주식으로 삼는 라오스 치앙라이와 치앙마이가 있는 태국 북부와 동북부 이싼 지역, 미얀마 샨주의 공통점은 산악이나 고원지대라는 것이다. 찹쌀은 멥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을 덜 필요로 한다. 중국에서 인도차이나 북부로 밀려 들어온 따이인은 대규모 관개시설을 만들기 어려운 자연적 조건에서 찹쌀을 경작하는 편이 유리했다.
라오인이 경작해온 찹쌀은 ‘타 독 카오’라는 종과 태국 이싼 지역에서 개발된 향기가 나는 찹쌀이다. 현재 라오스에서 경작하는 찰벼 종자는 세계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홍수에 대한 내성이 강한 종자와 재래종인 타 독 카오를 교배시켜 만들어졌다. 개량된 찰벼는 우기에 강우가 집중돼 2미터 깊이로 2주간 잠기더라도 60% 이상이 생존할 수 있고, 생산량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라오인이 찹쌀을 주곡으로 삼은 건 자연적 조건에 순응한 것이지만 낮은 인구압 덕분이기도 했다. 멥쌀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소출로도 라오인들은 식량난을 겪지 않았다. 한국인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한과 아픔이지만 따이인 과거는 풍요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라오스에 인구압과 식량난이 심각했다면 생산량이 월등한 멥쌀로 갈아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를 관통해서 바다를 향해 진출해 나간 따이족 일원이었던 타이인은 몬-크메르, 버마족과 각축을 하면서 멥쌀을 선택하게 됐다.
라오인의 밥통과 밥그릇을 팔러 다니는 행상. (사진=우희철 작가)
3. 라오어에는 젓가락이란 단어가 없다
라오인은 밥을 '한다'와 밥을 '찐다'라는 표현을 같이 쓴다. 멥쌀로 밥을 지을 때는 ‘밥을 한다’고 하고, 찰밥을 지을 때는 ‘쌀을 찐다’고 한다. 찰밥은 장작불이나 숯불로 물을 끓이고, 채반에 씻어 올린 찹쌀을 수증기 열로 찌어 짓는다.
찰밥을 찌는 식기는 수증기를 끓이는 용기만 철제이고 나머지는 죽제품이다. 채반과 뚜껑, 밥통과 밥그릇을 대나무로 만든다. 쌀밥은 덮밥을 만들기 좋게 접시를 쓰지만 찰밥은 여전히 원통형 밥그릇을 많이 쓴다.
라오인들은 찰밥을 손으로 뭉쳐 꼬마 주먹밥으로 만들어 다진 양념이나 반찬에 찍어 먹는다. 수증기로 찐 찰밥은 손에 달라붙지 않는다. 라오인은 식사 전 ‘고시레’ 하는 경우가 많다. 고시레는 당연히 신앙의 표현이지만 어려운 조건에서 명분 있게 손을 씻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라오어에는 '젓가락'이라는 고유어가 없다. 젓가락을 ‘마이 투’라고 부르는데, 나무를 뜻하는 라오어 '마이'에 영어 'two'를 붙인 말이다. 나무 작대기 두 개. 국수가 보급되기 전 찹쌀이 주식이던 라오인에게 젓가락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타이어에는 젓가락이란 단어가 있다.
라오스의 민물 젓갈 빠덱. (사진=우희철 작가)
4. 다진 양념
라오인 밥상에 빠질 수 없는 게 라오식 다진 양념 ‘쩨우’다. 라오인의 쩨우 사랑은 각별하고 진심이다. 찰밥을 간도 없이 맨밥으로 먹을 수 없으니 쩨우에 찍어 먹는다. 쩨우 모양과 색깔은 한국의 다진 양념과 아주 흡사하다. 쩨우 재료는 사람마다 집집마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다. 쩨우는 찰밥 먹을 때만 쓰는 게 아니라 모든 라오 음식 간 맞추는 데 쓰인다.
쩨우의 간은 민물 젓갈이 결정한다. 쩨우가 없으면 찰밥을 먹기 어려우니 라오 여성들은 비가 그치기 무섭게 투망으로 작은 물고기를 잡는다. 잡은 민물고기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만든 젓갈이 ‘빠덱’이다. 빠덱은 우리의 젓갈처럼 끓여서도 쓰고 날 젓으로도 쓴다.
쩨우를 만드는 재료는 대체로 작은 고추, 태국 가지라 불리는 ‘커밋’, 마늘, 작은 양파처럼 생긴 ‘샬럿’, 쪽파를 구워서 쓴다. 한 가지 한 가지 구운 재료들을 흙절구에 넣고 민물 젓갈, 라임즙, 설탕, 조미료를 넣어가면서 나무 공이로 버무리며 빻아 섞는다. 고소한 맛을 추가하고 싶으면 땅콩을 넣고 잘게 부숴 섞이도록 한다.
라오스 쩨우와 한국 다진 양념의 결정적 차이는 매운 강도이다.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어설펐던 시절 한국인들은 매운 고추를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우리가 얼마나 독한 민족이냐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한국인이 칼국수에 넣는 양만큼 라오식 쌀칼국수에 쩨우를 넣는다면 한입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젓가락질을 계속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허세를 냉수로 지우고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소리 없이 나가는 한국 관광객을 본 적도 있다.
5. 쏨땀과 땀막훙
찰밥에 빠질 수 없는 대표적 반찬이 ‘땀막훙’이다. 원조 논쟁이 위험하지만 태국 요리 ‘쏨땀’ 원형이 ‘땀막훙’이다. 영어로 메뉴에 ‘그린 파파야 샐러드’라 적혀 있으니 샐러드를 연상하는데 파파야채로 이해하면 쉽다. 쏨땀과 땀막훙 두 요리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땀’은 요리 방법이다. 땀은 절구에 찧어서 만드는 요리 방법을 나타낸다.
쏨땀의 ‘쏨’은 발효를 뜻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선 젓갈을 의미한다. ‘막훙’은 파파야. 같은 요리지만 타이인은 젓갈을 강조했고, 라오인은 주요 식자재를 강조했다. 젓갈을 넣고 절구에 빻아 만드는 응용 음식은 많이 있다. 라오인이 깊은 맛과 감칠맛을 내게 하되 간이 빨리 스며들도록 개발한 요리 방법이 땀이다. 땀 뒤에 식자재 이름을 붙이면 요리 이름이 된다.
찰밥, 다진 양념, 파파야채는 물리지 않는 라오인 주식이다. 한국인도 즐길 만하다. 맛있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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