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철원 계웅산에서 보이는 법률적 비무장지대(DMZ)와 실제 DMZ는 다르다. 군사정전협정은 살아있으나 DMZ 남방한계선은 조금씩 북진했다. DMZ 북방한계선이 자꾸 남하한 결과이다. 두 한계선이 붙는 날에는 DMZ가 사라지고 휴전선만 남을 것이다. 백마고지와 '피의 능선'이 바라보이는 DMZ 남측 방어벽 앞에 자리 잡은 윌정리역에는 끊어진 경원선이 멈춰 있다. 그 인근 평화전망대에서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과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께서 북녘을 지키면서 민족자결과 대동평화를 빈다.
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75차 UN총회 기조연설에서 꺼낸 종전선언은 종교복음처럼 훌륭하다. 문 대통령은 올해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한반도에서 전쟁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종식되어야 한다. 종전선언을 통해 화해와 번영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엔과 국제사회도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백 번 옳은 말씀이 왜 벅찬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7월 독일 통일의 현장 베를린에서 남북통일보다 평화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의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며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2018년 2월)을 앞두고 정가에서는 날선 발언들이 쏟아졌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휴전 중인 한국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연내 종전선언과 함께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로 남북이 합의했다"는 판문점선언을 발표하였다. 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통화에서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긴밀히 소통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부속서로 채택하였다. 이 합의서는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군사적 대책을 강구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평화수역 조성 및 안전한 어로활동 보장을 담았다. 청와대는 평양공동선언문을 사실상 종전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음은 미국이 평화협정에 서명하려면 반드시 북한의 비핵화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백악관에서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를 달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려는 양국 공동의 목표와 함께 '실패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이후의 대북 대응 방안을 협의하였다. 문 대통령은 이어 2019년 9월 제74차 UN총회에서 남북간 전쟁불용, 안전보장, 공동번영의 원칙을 담은 기조연설문을 발표하였다. 문 대통령의 표현처럼 "김정은 위원장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그 자체로 새로운 평화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상외교 과정을 살펴보면, 문 대통령이 제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호소한 종전선언은 미국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하여 민간은 적극적이다. 민(民)의평화협정준비위원회는 지난 7월24일 한반도에서 소모적 갈등과 군사대결을 끝내기 위한 한국전쟁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민의 한반도 평화협정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제 와서 우리 대통령이 여전히 종전선언을 표방함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이 서명 당사국이 아닌 한국군사정전협정(1953년)은 남북한의 자력으로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말의 성찬이 아닌 역사적 진전을 이룩하자면 공동성명과 같은 정치적 선언을 넘어 남북의 독자적인 남북불가침협정 및 군비축소협정에 이은 남북평화협정을 연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군사정전협정와 군사정전위원회가 존재한다고 하여 주권 국가들 사이의 평화협정 체결이 불가능하지는 아니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종식되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철학은 만인의 염원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언명처럼 한반도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남북 간에는 정치군사적 기본전략에 따라 추진해야 할 과업들이 산적해 있다.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DMZ의 평화적 이용, 공적개발원조(ODA), 남북무역, 남북환경협력, 농림어업협력 등이 그것이다. 정상들의 수사를 넘어 실질적인 역사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담대한 전략을 기대한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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