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2015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신생기업의 수는? 443만9000개. 중국에서만 하루 평균 1만2100개의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휴일을 빼면 평일 기준 1만7700개의 기업이 매일 중국에서 탄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다수 창업이 자영업인데 반해 중국의 이 통계는 자영업과 협동조합을 제외한 숫자여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창업열풍은 3대 인터넷 기업인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도 창업 열풍이 뜨겁다. 그야말로 전세계적으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시대다.
유망한 스타트업 기업에 투자를 해서 수익을 거두는 투자기업들은 헬스케어 분야에 대한 투자비중을 높이고 있다. 건강은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절박한 바람이며 의료건강분야는 부가가치가 높을 뿐더러 새로 개발할 여지가 많은 분야다. 창조경제를 외치는 정부 관료들과 여당 의원들은 의료산업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휴대폰 진료를 허용하는 소위 원격의료가 반드시 법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수년 전부터 법개정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의사들을 향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창조경제의 길목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모 일간지에 ‘헬스케어 혁신기술을 위해 공학과 의학이 만났다'는 제목의 기사가 소개됐다. 미국 보스턴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팀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 브리검 여성병원, 보스턴어린이병원 등과 공동연구를 통해 8개의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공식 출범시켰다는 소식이다. 또 벤처기업들이 MIT 스타트업 경진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과 각 스타트업 기업들이 개발했거나 개발 중인 대표적인 제품들을 소개했다.
이 제품들은 최근 헬스케어 분야의 첨단산업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소개된 8개 제품들을 살펴보면, 아스트라이오스 테크놀로지사가 개발한 스마트폰 폐암 검진기, 서빅스 세이버스사가 개발한 자궁경부암 진단기, 귓속 염증을 쉽게 진단할 수 있도록 만든 이어ID, 굿SIRS사가 만든 패혈증 감시장치, 헤럴드사가 만든 환자정보 보조장치, 산소전달시스템, 여러 알약을 하나의 알약으로 바꿔주는 3D프린팅 알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이드킥 솔루션즈사가 만든 스마트폰으로 전자의무기록을 할 수 있는 복스독스였다.
하나같이 독특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제품들로서 정부가 부르짖는 창조경제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중 정부가 추진하는 원격의료와 관련이 있는 제품은 얼마나 될까. 하나도 없다. 8개 제품 중 6개 제품은 ‘원격’과 무관하며, 휴대폰을 이용한 폐암 검진기나 스마트폰 전자의무기록장치도 진료의 보조장치일 뿐 대면진료를 대체하는 원격진료와는 무관하다. 그뿐 아니다. 헬스케어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새로운 제품의 대다수는 원격진료가 아니라 IT와 의료가 결합된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이다.
정부 관료들과 여당 의원들은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려고 미래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사실 그 어느 산업분야보다 가장 앞서 디지털화된 곳이 의료분야다. 우리나라 의료는 그 어떤 나라들보다 빨리 전산시스템을 도입했다. 미국 의사들의 20%만이 전자차트를 사용하고 80%가 여전히 종이차트를 사용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 의사들은 99%가 전자의무기록장치를 사용했다. 또 어떤 나라보다 앞서 엑스레이 필름을 없애고 디지털 영상이송장치인 PACS를 도입했다.
정작 미래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정부 관료들과 휴대폰 진료라는 엉뚱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이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원격진료를 구분하지 못하는 관료들과 일부 정치인들 때문에 헬스케어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제품을 개발하는데 힘써야 할 의사들이 원격의료라고 이름 붙여진 휴대폰 진료를 막겠다며 투쟁에 나서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에는 한의사들에게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의사들은 정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선진외국의 헬스케어 분야 스타트업 기업들 탄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사물인터넷으로 시작하는 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서 국가간 기업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 병사들은 엉뚱한 명령을 내리는 무지한 지휘관과 싸우느라 전쟁터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창조경제의 전쟁은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에서 이뤄진다. 관료들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맡겨둔다면, 대한민국의 전문가들은 전문영역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올 것이다. 병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가 고지를 다 넘겨준 후에서야 실수를 인정한다면, 전쟁의 패배는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추락하는 대한민국호를 지켜내지도 못할 것이다. 요즘만큼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원망스러운 적이 또 있었던가. 이 나라의 미래는 지금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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