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가 따로 없다. 당최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자성이 없고, 때문에 누군가 잘못을 떠안을 희생양을 찾는다. 홍명보가 그렇고 박주영이 그렇다. 기성용도, 이청용도, 정성룡도 매도 대상이다. 그렇게 언론은 불난 집을 들쑤셔 놨다. 마녀사냥이다.
지난 3월 그리스와의 평가전에서 박주영이 골을 넣자 모든 언론이 열광했다. ‘역시 박주영’, ‘명불허전’, ‘살아있네’ 등의 제목과 함께 홍명보의 선택이 옳았다고 단언했다. 중원의 기성용 지휘 아래 좌우 날개 손흥민과 이청용의 빠른 침투와 박주영의 골 결정력이 더해진 대표팀은 역대 최강 전력임을 확신했다. 골키퍼 정성룡은 이청용, 기성룡과 함께 한국축구를 짊어질 3용으로 불렸다. 홍명보 키즈로 일궈낸 올림픽 동메달의 성과는 2002년 4강 신화와 함께 사상 첫 원정 16강을 넘어 8강 진입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1무2패, 조 최하위로 브라질 월드컵을 마감하자 언론은 표정을 바꾸고 돌팔매질에 나섰다. 러시아전이 끝났을 때만 해도 "잘 싸웠다"며 박수를 보낸 그들이었다. 16강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되짚고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돌부터 집어 들었다. ‘으리 축구’ 신조어가 지면을 메웠고, 홍명보와 박주영은 실패자로 낙인이 찍혔다. 대통령을 따라 초법적 심판자의 위치로 스스로를 끌어다 올린 채 공과를 재단했다. 모든 게 네 탓이었다. 그렇게 여론을 호도했다. 제멋대로 여론을 포장했고, 이는 매도의 정당성 근거로 활용됐다. ‘기레기’ 짓이다.
정몽준, 조중연, 이회택, 허정무에 이어 홍명보까지. 축구협회의 독선과 줄서기, 그들만의 카르텔로 점철된 뿌리 깊은 구조적 병폐는 뒤로 밀렸다. 이들을 향했던 축구계 내부 쓴소리도 의미를 되찾지 못했다. 축구협회라는 거대 기득권과 손잡고 그간의 잘못에 동조, 내지 침묵했던 언론의 통렬한 자기반성도 없었다. K리그를 뒤로 한 채 유럽 빅 리그만 쫓는 방송의 사대주의도 묻혔다. 문제의 본질을 찾지 못하니 대안은 더더욱 자리하기 힘들었다.
그 자리를 비난과 욕설, 칼질이 대신했다. 그렇게 우리는 죄인을 만들고 탈출구를 찾았다. 2002년 온 국민을 환호하게 한 영웅에서 한순간 죄인으로 떨어진 홍명보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은 없었다. 박주영이 아스널과의 계약 만료로 무적 신세가 되자 축구천재의 추락을 오히려 반겼다. 위로는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언론은 전형적인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한국축구를 갈기갈기 찢었다. 글의 폭력은 잔인한 비수가 됐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 스페인에서는 조별 예선에서 허무하게 탈락한 전 챔피언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5대 1이라는 네덜란드전 치욕적인 참패를 시작으로 칠레에도 무릎 꿇으며 짐을 싸야만 했던 자국 축구의 몰락을 같이 아파했다. 그리고 이들을 맞이한 언론 헤드라인은 "용서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당신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챔피언이던) 그 시간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였다. 그렇게 상처를 보듬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픔은, 그렇게 치유됐다. 또 다시 내일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유다.
산업1부장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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