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한스 안데르센(1805~1875)이 21세기에 살았다면 어떤 동화를 썼을까? 안무가 이경옥은 "분명히 청소년 왕따에 관한 이야기를 썼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경옥은 최근 수년 동안 안무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줄기차게 탐닉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안데르센 동화 속에 숨어 있는 '비뚤어진 안데르센'의 모습이다.
◇팝아티스트 마리킴이 만든 이미지. 무용공연 <빨간구두 셔틀보이>에 사용된다.
안데르센을 향한 도전은 이미 주목할 만한 성과도 거뒀다. 지난해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하는 '2012 대한민국 무용대상'에서 이경옥무용단의 <슬픈빨강, 헨젤과 그레텔에게>라는 작품은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올 봄에는 국립무용단과 함께 <빨간구두 셔틀보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안데르센을 펼쳐보일 예정이다. <슬픈빨강, 헨젤과 그레텔에게>를 모태로 하는 이 작품의 주 관객층은 중.고등학생으로, 오는 4월 9일부터 13일까지 KB국민은행청소년하늘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씨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대전예고 무용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했다. "청소년 문제에 무지하다는 생각에 2년 정도 하다 그만 뒀다"고 했지만 학생들에 대한 그의 부채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안데르센 동화 속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대 청소년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재구성한 이번 무용공연이 그 증거다. 다음은 지난 7일 국립극장에서 안무가 이경옥과 나눈 일문일답.
-<빨간구두 셔틀보이>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어렸을 때 안데르센, 그림형제 같은 동화전집을 많이들 본다. 그런데 동화 자체 말고 저자에 대해서도 탐닉할 게 굉장히 많다. 안데르센을 소재로 삼은 유명 연출가의 연극도 있지 않나. 안데르센 동화의 소재 자체가 '이 사람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를 너무 궁금하게 만든다. <미운오리새끼>, <빨간 구두> 하나하나가 그렇다.
-안데르센에 대한 관심 외에 동화의 구체적 내용도 안무를 창작하기에 좋은 소재인지?
▲안데르센 동화에는 안데르센이 있다. 비뚤어지거나 완성되지 못한 자아가 공통적으로 그 안에 들어 있다. <눈의 여왕>의 경우, 카이의 여자친구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떠나기 위해 배를 타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게르다가 빨간 신발을 강물에 벗어 던지자 그제서야 꿈쩍 않던 배가 출발한다. 빨간 신발로 흔적을 남기고 가니까 배가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런 빨간 신발이 안데르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그림자도 결국 안데르센의 자화상이라 하더라. 원래 안데르센은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는 사람이었고, 상류사회 부인들과 어울리는 성공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화 소재 속에 그런 부분이 하나하나 묻어난다. 표면적인 이야기 외에 그런 숨어 있는 부분이 안무할 거리가 된다.
-청소년을 주된 관객으로 삼다보니 비슷한 소재를 다룬 이전 작품 <슬픈빨강, 헨젤과 그레텔에게>보다는 아무래도 스토리텔링이 강조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보면 현대 청소년의 상황을 이야기에 끼워 맞추게 될 위험도 있지 않나?
▲2년 정도 대전예고에서 무용부장으로 교사 생활을 했었는데 그 때 경찰차를 탄 적이 있다. 부임하자마자 신학기에 남자 아이가 사고를 쳐서다. 그런데 그게 일상이라더라. 학교의 현실이 그렇다. 특히 안데르센 동화의 경우 이런 학교 현실과 유형이 비슷한 것들이 많다. <미운 오리새끼>나 이런 것들 보면 자기와 모양이 다르다고 왕따를 시키지 않나. 동화 속에 그런 비슷한 대목이 여러가지 있다. 이번 작품은 옴니버스의 형태를 지닌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다.
-장면마다 주요 이미지나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
▲영상, 비주얼이 작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이다. <눈의 여왕>에서는 눈의 여왕이 백조같은 이미지로, <빨간 구두>에서는 빨간 구두만 신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빨간 구두>의 주인공 카렌이 빨간구두만 신는데 흔히들 이 인물이 여자라고만 생각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남자들이 신는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나이 든 무용수도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우리 부모들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나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 부모님이 때로 슬픔을 지닌 광대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에 곡예도 들어간다고 하던데?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들이 마치 주머니같은 숙주처럼 천장에서 내려온다. 숙주 모양을 폈다 줄였다 하면서 나중에는 아크로바틱같은 춤을 추게 될 것이다. 무용수들이 연습하느라 고생하고 있다(웃음).
-이미지, 영상, 음악, 디제잉 등 다채로운 요소가 이번 작품에 들어온다. 스태프가 팝아티스트 마리킴, 미디어아티스트 최종범, 음악감독 김민경, 디제이 수리 등으로 화려할 뿐만 아니라 전 작품과도 거의 겹친다.
▲나와 딱 맞는 사람들이다. 마리킴은 갤러리에 그림 구경하러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만난 친구다. 그 친구 그림이 보통 한 장에 1000만원이다. 투애니원(2NE1) 뮤직 비디오 하나 하면 1억 넘어간다. 그런데 이 작품만을 위한 그림을 따로 그려주기도 한다. 쿨한 친구다. 영상을 맡은 최종범은 마리킴의 그림을 분해해서 영상으로 구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공연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이번 작품에서 소리가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리는 음악감독 김민경과 디제이 수리가 함께 담당한다. 클래식 음악과 디제이의 믹싱 작업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진행할 예정이다. <눈의 여왕>의 경우 성가곡을 바탕으로 삼아 볼륨을 키우고, 소리를 왜곡할 생각이다.
-이경옥의 무용작품과 마리킴의 그림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혹시 그림이 안무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나?
▲그림을 보고 안무를 짜지는 않았다. 어찌 하다보니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내 정서와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경옥의 작품세계는 아방가르드하고, 기괴하고, 비틀어진 느낌을 자아낸다. 이번에는 국립무용단과 함께 청소년 대상으로 무대에 올리는데 혹시 표현을 순화하거나 따로 고려한 부분이 있는지?
▲눈높이를 맞추려고는 하지만 표현을 순화시키지는 않는다. 관객이 청소년이라고 해서 '애들용 작품'을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애들이 어른 머리 꼭대기에 있지 않나(웃음). 마리킴 작품에는 여자아이 하반신에서 꽃이 피어나는 식의 표현부분도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예술로, 관념적인 부분으로 소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 대상이고 국립이기도 해서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청소년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길 원하는지?
▲아이들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동화가 아이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했으면 한다. 현재 위치를 알아야 그 다음 대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내가 어디 만큼 와 있는지를 알아야 앞으로 더 나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만족할 것인지 태도와 위치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혼란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뭔가 얻어지지 부모가 시키는 대로 가면 나중에 커서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직접 생각하는 계기를 던져주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 빵 사오라고 시키는 '빵셔틀' 같은 것, 이런 것은 생각 없이 대책 없이 그냥 말로 나오는 거다. 자기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안 하게 될 거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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