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트럼프 고무줄 잣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2025-04-03 06:00:00 2025-04-03 06:00:00
1990년대 인터넷이 보급화되기 시작한 이후 30년이 흘렀음에도 '망 중립성'과 '망 사용료'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망 중립성이란 본래 모두에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데서 출발한 개념이다. 데이터 사용량이 많다고 해서 접속을 차단하거나, 속도를 제어하거나, 별도의 이용료를 부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 골자다. 문제는 데이터 트래픽 양이 계속해서 늘고 있고, 트래픽을 소화하기 위해선 망 투자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망 중립성 개념이 처음 논의될 때만 해도 트래픽 양이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으리라. 현재 트래픽 폭발의 주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다름 아닌 빅테크기업의 플랫폼들이다.
 
오랫동안 망 중립성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선한 가치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접근성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은 필요하나 이를 위한 도구, 즉 망 투자라는 비용 문제가 남겨져 있는 까닭이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행정부 때 망 중립성 원칙을 규제화했지만 이후 트럼프 정부 1기가 들어서며 이를 폐기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해외 빅테크 플랫폼의 진격으로 망 중립성보다는 망 사용료 부과가 국익에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논의가 흘러왔다.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가 3년간 싸워왔던 망 사용료 소송이 대표적이다. 소송은 일단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이후 국내에서 망 무임승차 방지 관련 법안들이 속속 발의되면서 망 사용료에 무게가 좀 더 실렸고 결과적으로 구글 등 미국 기업들의 불만이 커진 상황이다.
 
그러던 중 트럼프 정부 2기가 시작됐고,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에 브렌던 카가 임명됐다. 브렌던 카는 본래 빅테크의 인터넷 인프라 무임승차 문제에 대해 지적하던 인물이다. 때문에 올초만 해도 국내에선 해외 빅테크를 상대로 어쩌면 우리도 망 사용료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거란 낙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헛된 기대가 돼 버렸다. 올해 3월 마지막 날 미국 행정부는 '2025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에서 국내의 망 무임승차 방지 법안을 콕 집어 '무역장벽'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망 중립성 폐기 및 망 사용료 부담과 관련한 논의는 결국 미국에 한정된 얘기였을 뿐임이 드러난 셈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자국에서 기존 통신사 외 빅테크 기업으로부터도 보편서비스기금(USF)을 받아내고자 하고 있다. 미국 내 망 중립성 원칙 폐기의 목적은 결국 이 기금의 재원 충당 등 자국 내 목적에 한정된 것이나 다름없음이 확인됐다.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 우리의 입장과 전략을 명확히 해야할 때다. 협상의 기본은 상대에 대해 잘 파악하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당분간 미국과 외교, 무역에서 상호적 호혜에 대한 기대는 접어둬야 할 듯싶다. 트럼프 정부의 유일한 철학은 결국 자국의 이익이다. 게다가 항상 선공부터 날리며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식이라 미국에 비해 힘이 한참 모자란 우리나라로서는 감당하기가 더욱 어렵다.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데 비용이 발생하면 서비스 제공자가 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시장 논리도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강대국의 우격다짐 앞에서 현재로선 무력하다. 우리도 물론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어야 하지만, 논리만을 내세워선 해결이 요원할 것이란 얘기다.
 
트럼프 시대에는 아마도 미국 외 국가들과 긴밀한 연대와 공조가 중요해질 공산이 크다. 그나마 정보통신기술(ICT)은 다른 분야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각 나라별 정책이나 규제에 대한 존중이 유지돼온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라 하더라도 이 부분까지 함부로 침범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ICT 현안에 대한 주요국의 입장 파악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우리와의 공통분모에 대한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외교 역량을 다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에 너무 쉽게 내어주면 다음에는 중국 정부가 같은 요구를 해올 수 있다. 힘의 논리에 너무 쉽게 무너져선 안 되는 이유다. 하필 이 어려운 시기에 국내 정세가 뒤숭숭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정부 부처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려 전략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에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란다.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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