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 주 토요일, 세계 자살유가족의 날을 맞아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직접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뜻깊은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긴 침묵과 편견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유가족들은 이날만큼은 서로의 고통을 듣고, 서로를 불러내어 연결하는 자리, 그리고 당당한 시민으로서 사회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사자들이 직접 사회로 나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16일 오전 11시부터 4시까지, 서울 중구 전태일기념관. 2018년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모임을 이어온 ‘자살유가족과따뜻한친구들’이 직접 기획·주최한 ‘2025 세계 자살유가족의 날 행사’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열렸습니다. 유가족이 직접 꾸린 ‘2025 세계 자살유가족의 날’ 행사는 ‘초대의 시 낭독’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몸과 마음의 연결을 찾는 움직임 활동에 이어 재단 ‘한살림밥상’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어 두 명씩 짝을 이루어 한 사람을 애도하는 시간, 그리고 “오늘의 활동 중, 나에게 가져가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를 나누는 의미 공유로 이어졌습니다.
‘자살유가족과따뜻한친구들’이 직접 기획·주최한 ‘2025 세계 자살유가족의 날 행사. (사진=자살유가족과따뜻한친구들)
행사 진행자이자 유가족인 김혜정 대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 자체가 정서적·신체적 고립을 줄여줍니다. 충분한 애도가 허락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날 모인 유가족들은 말보다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지지와 안전을 제공하는 공동체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유가족 당사자가 스스로 운영하는 자조모임이 자살 예방에 큰 역할을 해온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당사자 중심 위로 모임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한 참여자는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모임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야 합니다. ‘함께 애도하고 지지받는 경험’이 있어야 우리도 사회 구성원으로 제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작지만, 결코 그 의미는 작지 않은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같은 취지로 자살 유가족을 위한 또 하나의 치유 행사가 열렸습니다.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공동 주최한 ‘11월의 크리스마스–11월의 겨울, 마음에 다시 빛이 켜지다’ 행사입니다. 지난 15일 오후 3시부터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 이 자리에는 60여명의 자살 유가족과 3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함께 했습니다. 행사는 ‘기억의 나무’에 추모 메시지 남기기, 아로마 향기 이완, 어깨 안마, 포토존 활동, 고인 또는 자신에게 보내는 마음 엽서, 미술치료·감정 디톡스 체험, 유족협회 소개, 그리고 연극 ‘내 모든 걸’ 관람까지 이어졌습니다.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공동 주최한 ’11월의 크리스마스–11월의 겨울, 마음에 다시 빛이 켜지다' 행사. (사진=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
라이프호프 조성돈 대표는 “유가족이 자신의 상실을 숨기지 않고 함께 기억하며 위로받는 순간, 비로소 삶의 빛이 다시 켜집니다. 이 불빛들이 모여 우리 사회 전체가 생명존중 문화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처음 참석한 한 유가족의 말은 행사의 취지를 온전히 보여줍니다. 라이프호프 조성돈 대표는 유가족 중에는 “웃어도 되는 건가요?”라고 묻는 분도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울기만 한다고, 누군가는 웃는다고 비난받는 유가족. 이들이 마음껏 ‘웃어도 되고, 울어도 되는’ 회복은 이런 만남과 참여로 시작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처방입니다.
“유가족 경험, 생명 지킬 자원"
두 행사는 성격도 다르고,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유가족이 스스로 사회에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감춰야 할 금기어이고, 유가족은 그 그림자 속에서 고립돼 왔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나와 말하고, 만나고, 연결되는 순간, 그 자체가 편견을 깨는 ‘사회적 혁명’입니다. 중앙대 현명호 교수는 “고립을 줄이면 자살위험이 줄어든다. 유가족의 당사자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상실 후 회복이 빨라지며, 유가족의 경험은 다시 사회의 생명을 지키는 자원이 된다. 이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올해 세계 자살유가족의 날, 유가족들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자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숨지 않겠다. 고립 대신 연결을 선택하겠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겠다.” 그 다짐은 자신과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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