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의료 기술의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사진 : ChatGPT 생성)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지난 2025년 4월30일, 보건복지부는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습니다. 개정안은 "우수한 신의료기술의 조기 활용"을 명분으로, 식약처 허가를 받은 의료기기에 한해 최대 3년간 신의료기술평가를 유예하고 비급여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제 완화 방안에 대해 GCN녹색소비자연대, 한국YWCA연합회,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등 3개 시민사회단체는 "환자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반인권적 조치"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7월29일 공동성명을 통해 "의료 소비자의 안전을 위협하고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제도 개악"이라며 개정안의 즉각 폐기를 요구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개정안의 핵심 문제로 '검증되지 않은 기술의 조기 사용'을 지적합니다. '신속 도입' 뒤에 자칫 생명 경시를 우려하면서 국민이 '의료기술 실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새로운 수술법이나 진단 기술 등이 환자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지를 사전에 검증하는 제도입니다.
현행 제도 하에서는 이 평가를 통과해야만 의료 현장에서 환자에게 제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정안은 이 같은 절차를 최대 3년간 유예하도록 허용합니다. 시민단체들은 "이는 의료기기의 안전성만으로 기술 전체를 신뢰한다는 무책임한 판단"이라며 "환자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제도화된 임상실험'"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비급여 사용 허용, 의료비 폭탄 될 것"… 공공의료 보장률 하락 우려
이번 개정안이 가져올 가장 직접적인 피해는 환자의 지갑 문제입니다. 현재 신의료기술평가를 받지 않은 기술은 급여 적용 대상이 아니므로, 환자는 해당 치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해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은 "고액의 비급여 진료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면 국민 의료비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이는 곧 건강보험 보장성을 악화시키고 공공의료 기반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정부는 기존의 '시장 선진입 제도'가 혁신 기술의 도입을 지연시킨다는 점을 들어 규제 완화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이미 기존 제도가 충분히 존재한다"며 "이번 조치는 특정 기업의 빠른 수익 실현을 위한 산업 포퓰리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장관 직권 평가 조항? 면피용일 뿐"… 관리 감독도 뒷걸음질
보건복지부는 개정안에 장관 직권으로 신의료기술평가를 실시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단체들은 "실효성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환자의 피해가 발생한 후에야 평가가 이뤄진다면 이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며 "지금도 기존 제도에 대한 감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런 '장관 재량' 조항이 실제 발동될 가능성은 낮다"고 비판했습니다.
GCN녹색소비자연대 고민정 사무총장은 "실험 참여에 동의한 적이 없는 국민들이 자동으로 임상실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보건복지부는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시켜 의료산업의 발전과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책이 아닌 근거 기반의 평가와 환자 중심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료기술 혁신의 숨통을 터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 같은 시민단체들의 입장에 대해서 업계나 의료계에 다른 목소리도 있습니다. 안전성은 이미 식약처에서 검증한 것으로 봐야 하며, 현재 한국의 관련 규제 중복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번 정부 개정안이 적용되는 전제 조건은 '식약처 허가를 받은 의료기기'라는 점입니다. 식약처는 엄격한 허가 절차를 거쳐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성능을 이미 평가하고 있으며, 유럽 CE 인증이나 미국 FDA 허가를 받은 제품이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신의료기술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중 규제가 지금까지 많은 기업의 발목을 잡아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2022년 한국바이오협회의 '신의료기술 진입장벽 실태조사' 조사에 따르면, 신의료기술평가를 준비하던 스타트업 10곳 중 4곳이 시장 진입 전에 사업을 중단하거나 도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소 의료기기업체 대표는 "식약처가 안전성을 검토했고, 비급여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의 선택에 의한 사용은 최소한의 숨통을 틔우는 것"이라며 "지금은 규제가 너무 많아 신기술이 해외로 먼저 나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행 제도에서는 평가 과정에만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소요되며, 그동안 환자 치료에 활용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는 AI 기반 진단기기나 로봇수술 기술처럼 기술 변화 주기가 매우 빠른 분야에서는 평가가 끝났을 무렵에는 이미 '신기술'이 아닌 '구기술'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관련 전문가들은 "신의료기술평가가 민간 혁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며 "애플워치에 들어가는 심전도 기술도 FDA보다 한국 신의료기술평가에서 늦어졌고, 이로 인해 국내 출시가 지연되거나 제한됐던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부 개정안은 '비급여' 사용을 허용하는 것이지 환자에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며, 공공의료 보장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설명 의무와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는 현행 비급여 시술이나 치료와 동일한 방식이므로 꼭 필요한 사람들만이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기술의 잠재적 이익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오히려 보장하는 조치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서울 소재 대형병원 임상 책임자는 "새로운 기술이 실제 의료 현장에 적용돼야 검증이 가능할 경우도 있다"며 "기술 적용과 환자 피드백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신뢰성과 안전성도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3년 영국의 국립보건원(NHS)도 비슷한 논리로 'EVA(Early Value Assessment)' 제도를 시행해, 일부 기술에 대해 조기 사용과 병행 평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임상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제한적으로 사용을 허용하고 데이터를 축적하여 평가를 병행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환자에게 더 빠른 접근성과 선택권을 부여하기 위한 제도적 타협인 셈입니다. 미국 FDA는 '혁신적 의료긱 프로그램(Breakthrough Devices Program)', 유럽연합은 'MDR 조기 도입 허용 조항', 일본은 'SAKIGAKE 제도' 등을 통해 의료기술이 시장에 조기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각에서는 한국은 식약처 허가 이후 다시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보건복지부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3중 구조로 돼 있어 '혁신 의료기기의 무덤 국가'라는 자조적인 평가가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한 서울대병원 교수는 "생명권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맞지만, 동시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제때 못 쓰게 하는 것도 또 다른 비윤리일 수 있다"며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보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해법"이라고 밝혔습니다.
안전성은 의료 체계의 근간이며, 국민이 안심하고 병원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신뢰의 버팀목입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료산업 신기술을 적정하게 살릴 수 없는 상황은 건강권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전성과 신뢰성 유지'와 '과도한 허들의 제거와 의료 신기술 육성' 사이에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 정책이 무엇인지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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