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이승재 기자]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신제품 개발이 늦어진다면, 1~2년 안에 중국의 기술 추격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기술 격차가 2~3년 차이인데, 1~2년 내로 1년 정도 더 단축될 수 있다. 중국의 개발 속도가 우리나라 기업의 제품 출시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이다.”(이종환 상명대학교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
“D램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이 HBM4까지 한국을 당장 따라잡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머지 않아 중국이 HBM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성능, 단가 측면에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 이보다 중국 제품이 저가 시장을 잠식하는 게 더 큰 위기다. 싼 제품을 많이 팔고 파이를 늘리는 게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이병훈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교수)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반도체 공장. (사진=CXMT)
DDR4 몰락시킨 중국, HBM으로
중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 반도체기업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중국 국영 반도체기업인 우한신신(XMC)이 HBM2를 양산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업력 9년에 불과한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도 HBM3 샘플 개발을 완료했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과 함께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호황이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가전과 자동차부터 AI 등 첨단산업까지 중국의 기술 굴기가 위협적인 가운데 반도체 산업에서도 제2의 ‘딥시크 쇼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메모리 3사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올해 연이어 범용 D램인 DDR4의 단종을 선언했습니다. DDR5나 HBM와 같은 고부가 제품으로 선회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기업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습니다. 원래부터 수익이 낮았던 DDR4 시장은 중국 기업의 진출 이후 본격적으로 가격이 붕괴했습니다. 실제 CXMT와 푸젠진화(JHICC)는 지난해 DDR4 8Gb를 0.75~1달러에 판매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당시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2016년 설립한 CXMT가 업력 수십년에 달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성장세는 중국에서 드문 풍경이 아닙니다. 파운드리의 SMIC, 전기차의 BYD, 가전업계의 TCL·하이센스 등 주요 산업군 전반에서 중국 기업들이 10년 사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이들 기업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기술 자립 명목으로 산업 전반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한 결실이 이제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 반도체 박람회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 부스에서 직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대만 매체는 CXMT가 2026년에 HBM3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2027년에는 HBM3E 시장까지 진입할 계획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성장해온 터라 사실상 공기업으로 불리는 CXMT가 2년 내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관측입니다.
다만, 업계에선 가전이나 전기차 등과 같은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품목과 달리 HBM은 기업간거래(B2B) 품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메모리 시장 진출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HBM의 주요 고객은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인 탓에 중국산 HBM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수요가 크지 않을 것이란 예측입니다. 고종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략기획실장은 “중국 기업이 HBM을 만든다고 해도 내수용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며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보안과 제품 경쟁력을 신경 쓰기 때문에, 중국산 저가 제품이 나온다고 해도 제품 경쟁력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4 납품 준비 단계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3~4년 정도라는 게 업계의 중론입니다.
아울러 HBM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기술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AI 가속기 시장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의 품귀 현상이 계속되자 주문형 반도체(ASIC)가 대안으로 부상 중입니다. ASIC 제조 팹리스인 브로드컴은 주문형 반도체인 구글의 ‘TPU’와 메타(META)의 ‘MTIA’를 개발 중에 있고, 마벨 테크놀로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이아’ 설계를 맡았습니다. 조 단위 돈을 투자해 엔비디아 GPU를 사재기한 이들 기업들이 중국산 저가 HBM을 구매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월드IT쇼에서 관광객들이 SK하이닉스 HBM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훈풍’에도 기술 격차 더 벌려야
이같은 ‘탈엔비디아’ 기조에서 수혜가 기대되는 것은 단연 HBM 제조사들입니다. AI 가속기 공급처가 다변화하는 만큼 AI 가속기에서 엔진 역할을 하는 HBM 수요도 커질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업계의 자신감은 이러한 배경에 기인합니다. 아울러 SK하이닉스가 HBM 주도권을 유지할 것이라는 시장의 믿음 또한 확고한 편입니다. 추후 HBM 후발 주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으나, HBM 기술력과 이를 기반으로 한 샘플 테스트 속도 등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분간 SK하이닉스 독주 체제가 지속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결국 관건은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더 벌리는 일. 격차까지 줄어들면 DDR4처럼 결국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HBM은 특정 제품으로 굳어지지 않고, 고객사의 요구에 맞춰 커스터마이즈되는 게 최근 방향성”이라며 “이 부분에서 다른 기업보다 국내 기업이 우위인 만큼 강점이 있는 분야를 지키고 고객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 실장도 “저가형 HBM 시장에서는 타격이 있을 수 있다”며 “지장을 받지 않게끔 최신 HBM을 계속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끝)
안정훈·이승재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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