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의 주범입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나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 전 부장이 대통령이 되려는 목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며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이 확정되자 신속하게 형을 집행했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셋째 여동생의 장남 김성신 유족 대표가 2020년 5월26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재규 형사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에 대한 재심이 열립니다. 첫 공판기일은 오는 7월16일로 지정됐습니다. 유족들은 김 전 부장이 유신독재에 항거하기 위함이었으므로 내란 목적이 없었다며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김 전 부장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명예 회복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 밖에 비상계엄 전 범행인데도 민간인인 김 전 부장이 군사재판을 받은 점, 변호사의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방어권을 보장받지 못한 점 등을 재심의 청구 사유로 들었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2020년 5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서울고법은 4년 만인 2024년 4월 재심 개시 결정을 위한 심문기일을 열었고 지난 2월19일 재심 개시 결정을 했습니다. 재판부는 수사관들이 김 전 부장을 수사하면서 수일간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가혹행위를 한 것이므로 형법 제125조의 폭행·가혹행위죄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수사관이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사실이 증명됐음에도 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성돼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재심 사유가 확정판결에 준하는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사안의 중대성과 역사성에 비춰 대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법원의 결정에 불복해 즉시항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서울고법의 판단이 맞다고 보고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습니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재심 사유로 △원 판결의 증거 등이 위·변조된 것이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원 판결의 증거가 된 증언, 감정, 통·번역이 허위인 것이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무고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은 경우 그 무고의 죄가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원 판결의 증거가 된 재판이 확정재판으로 변경된 때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게 무죄·면소, 형을 선고받은 자에게 형의 면제나 원 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에 관해 그 권리에 대한 무효 심결·판결이 확정된 때 △원 판결·전심 판결·기초조사 관여 법관, 공소제기·수사 관여 검사·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지은 것이 확정 판결로 증명된 때 등을 정하고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은 제422조에서 위 규정에 의해 확정판결로 범죄가 증명됐다는 점을 재심 청구의 이유로 할 때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사실을 증명해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란 범인이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된 경우, 공소시효가 완성된 경우, 사면된 경우 등이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의 존재는 확정판결을 대신하는 증명이어야 하므로 법원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돼야 합니다. 재판부는 위와 같은 규정들을 바탕으로 김 전 부장을 수사한 수사관들의 범죄행위가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겁니다.
형사재판의 재심은 유죄의 확정판결이나 유죄판결에 대한 항소 또는 상고를 기각한 확정판결에 대해서만 허용됩니다.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는 재심만을 허용하고 재심에서는 원 판결보다 중한 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체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재심을 허용하지만 피고인의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재심이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김 전 부장에 대해 수사관들이 폭행 및 가혹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으로서 재심 사유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직무범죄가 있었다면 원 판결 등에 사실 오인의 존재가 현저하게 추측된다는 이유에서 재심사유로 정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러한 사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원 판결에 사실 오인이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거나 직무범죄를 한 수사관이 수집한 모든 증거가 위법하게 된다는 취지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가혹행위 등을 한 수사관이 자백을 강요하거나 일정한 진술을 강요했다면 그 피의자 신문조사 등은 증거능력이 없지만, 이 밖에 그 수사관이 피고인 외 다른 사람에 대한 진술조서 등의 증거를 수집했다고 해서 유죄의 증거로 채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김 전 부장이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모든 증거가 위법해지는 것은 아니므로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사실 자체가 무죄가 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바람과 같이 내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점이 증명돼 내란목적살인이나 내란수괴미수 등의 혐의가 무죄로 판단된다면, 그 판결을 바탕으로 김 전 부장이 유신독재를 끝내기 위해 항거한 것이라는 점 등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재판에 대해 재심을 맡은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이 쏠립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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