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창욱 기자] 불확실한 글로벌 통상 환경 속에서 이른바 ‘라이벌’들의 협력 사례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시대’ 속에서,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던 기업과 국가들이 기존 대립 구도를 잠시 내려놓고 ‘원팀(One Team)’으로 뭉치는 움직임이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국회 '미래산업포럼' 발족식에서 최근 한국 경제의 도전 과제와 대응 방향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국회 ‘미래산업포럼’ 기조연설에서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제는 혼자 가기보다 함께 가야 할 시점”이며 “일본과의 액화천연가스(LNG) 공동구매, 탄소포집·활용(CCU) 기술 등에서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연합(EU)처럼 경제협력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도 함께 제시했습니다. 그간 모든 분야에서 두 나라가 치열하게 경쟁해왔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무역 질서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합종연횡’의 흐름은 국내에서도 확산되는 분위기입니다. 국내 철강업계 대표적인 경쟁자였던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은 지난 21일 ‘철강 및 2차전지 소재 분야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루이지애나에 약 8조원을 들여 신설할 제철소에 포스코그룹이 공동 투자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울러 양사는 2차전지 소재 부문에서도 협력을 이어간다는 계획입니다. 업계에서는 이 동맹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이고 전격적인 결정”으로 평가합니다.
방산 분야에서도 이 같은 변화는 감지됩니다. 군함 및 잠수함 분야의 대표적 경쟁 관계였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도 지난 2월 해외 함정 수출사업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양사는 방위사업청과 함께 ‘함정 수출사업 원팀 구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협업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함정 해외 수출사업 참여 시 HD현대중공업이 수상함 수출사업을, 한화오션이 잠수함 수출사업을 주관하며 상대 기업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도 일부 협력 흐름이 감지된 바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의 주요 경쟁사인 대만 TSMC와 손을 잡고,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술 및 서비스 공동 개발에 나섰습니다. 양사는 내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차세대 6세대 HBM(HBM4)부터 협력에 돌입하기로 했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최대 라이벌인 양사의 이례적인 협력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그 원인으로 꼽힙니다. 이들의 협업은 불안정한 무역 환경 속에서 기술 혁신과 공급망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원팀’ 전략이 향후 산업 전반에 걸쳐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합니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무역 장벽이나 보호무역 조치로 인한 부담을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번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 협력은 ‘관세시대’에 걸맞은 산업 협업 트렌드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앞으로도 이런 불안정한 환경이 지속된다면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국가 간, 경쟁사 간 동맹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박창욱 기자 pbtkd@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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