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흥국생명의 영구채 조기상환 연기 결정이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던 채권시장에 한파를 불러왔다. 국내 기업들이 외국에서 발행한 KP채권은 물론 글로벌 금융회사의 영구채까지 유탄을 맞았다. ‘영구채이지만 조기상환한다’는 시장의 관례를 깬 충격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에 변동성 장세의 대피처를 찾아 주식에서 채권으로 옮겨온 투자자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지난 1일 싱가포르거래소(SGX)에는 HUKLFI 4.475 PERP(영구채)의 콜옵션 미행사 공시가 올라왔다. 이 채권은 흥국생명이 2017년 11월 5억달러 규모로 발행한 30년 만기 채권이지만, 회사가 채권을 조기에 상환할 수 있는 콜옵션이 달려있었다.
통상적으로 금융회사가 발행하는 영구채는 시일이 되면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이 관례로, 첫 번째 행사기일을 며칠 앞둔 상태였다. 블룸버그도 일찌감치 9월14일에 ‘11월9일에 상환된다’고 공지한 바 있다. 전 세계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이용하는 단말기에 올라온 공지인 만큼 이에 근거해 채권은 콜옵션 미행사 공시 직전까지도 액면가 수준에서 활발히 거래된 것으로 전해졌다.
알고 보면 흥국생명도 시장의 암묵적 룰을 깰 만한 이유는 있었다. 영구채는 채권이지만 자본금으로 인정받기 위한 자금조달 목적으로 발행한다. 은행은 자기자본비율(BIS), 보험회사는 지급여력비율(RBC)을 맞추기 위해 발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현재 RBC가 당국의 권고 수준인 150%를 살짝 넘는 흥국생명으로선 이 채권의 콜옵션을 행사하려면 차환발행이 가능하거나 대규모 유상증자를 해야 RBC를 맞출 수 있는데 둘 다 여의치 않다.
HUKLFI 4.475 PERP의 발행금리는 4.475%이지만 약속한 콜옵션 행사일을 건너뛸 경우 패널티가 적용돼 연 6.7%로 인상된다. 흥국생명은 이보다 높은 8% 정도 금리로 차환발행을 도모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율도 관건이다. 채권 발행 당시의 원달러환율은 1100원을 넘나드는 수준이었다. RBC에서 자유롭다고 해도 상환해야 할 원금은 5500억원이 아니라 7100억원으로 불어난 상태다. KP채권으로 전액 차환발행에 성공해도 금리 상승분만큼 실질이자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시장의 눈높이에 맞춰 파격적인 금리로 차환발행을 하는 대신 시장에 미칠 여파를 감수하고 콜옵션 행사를 미룬 셈이다. 콜옵션 행사 주기는 이자지급일에 맞춰 6개월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다음번 행사일까지 시장의 추이를 지켜보며 자금조달 계획을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주 금융당국(APRA)까지 부채질하고 나섰다. 흥국생명이 콜옵션 미행사를 공시한 당일 APRA는 자국 내 금융회사들에게 자본증권의 리파이낸싱이 비용 면에서 경제적이지 않을 경우 콜옵션 행사를 자제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흥국생명의 선택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당장 KP채권시장부터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년부터 콜옵션 행사기일이 돌아오는 한화생명 HLINSU 4.7 PERP, KDB생명 KHLIIN 7 1/2 PERP, 신한금융지주 SHINFN 5 7/8 PERP는 물론 2025년 9월로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동양생명 TYANLI 5 1/4 PERP와 지난 6월 차환발행에 성공한 교보생명 KYOBOL 5.9 PERP까지 추풍낙엽 신세가 됐다. 이들의 시세는 하루만에 20~30%씩 급락했다. 은행들이 발행한 영구채는 이보다 낙폭이 적지만 평상시 볼 수 없는 시세에 머물러 있다.
A증권사 관계자는 “알리안츠 등 글로벌 금융회사 중에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기업들이 다수 있고, 이들이 발행한 영구채는 시장에서 그에 맞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흥국생명의 콜옵션 패스 사태는 아시아에서 처음이다 보니 충격파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당분간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는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5년 만기 채권’이라는 믿음도 사라져 영구채 발행도 쉽지 않게 됐다. 영구채로 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충족시킨 금융회사들로서는 흥국생명과 같은 결정을 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이자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신뢰도가 높은 금융회사 채권이 이런 대접을 받으면 이보다 낮은 등급을 받는 회사채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5%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만큼 기업들의 자금조달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주가 하락과 금리 상승이 맞물리며 채권시장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피해를 본 투자자들도 적지 않다. 또 다른 콜옵션 미행사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따라서 채권시장이 안정될 때까지는 금융회사와 일반기업들이 발행한 영구채, A등급 미만의 회사채는 피하고, 정부가 보증한 국고채나 상환 여력이 충분한 우량 기업의 채권으로 관심을 좁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대로 이런 여파에 휩쓸려 급락한 우량 기업의 KP채권을 노리는 공격적인 투자자들도 있다. 해외 투자자들의 오해로 생긴 기회를 포착했어도 환율 변동에 주의해야 한다. 채권에서 매매차익을 얻더라도 원달러환율이 하락하면 이익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KP채권은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서 제한된 정보만 제공돼 추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개별 증권사 지점에 문의하면 현재 거래 가능한 종목과 발행정보, 시세 등을 알 수 있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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