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탱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난방수요 증가 및 원유 증산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운임은 아직 더디게 움직이고 있지만 해외 증시에 상장된 탱커 주력 해운주들은 한 발 먼저 움직이고 있다.
24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지난주 건화물 운임지수(BDI)는 4410로 마감했다. 이는 5600선을 넘어선 2주 전에 비해 하락한 것이지만 여전히 10년래 가장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선박운임 상승을 이끈 컨테이너선 운임도 고공행진 중이다.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4583.39로 고점에서 한풀 꺾였으나 작년 말에 비하면 72% 오른 상태다.
이처럼 선박 운임이 높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주요 항만들의 혼잡 현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24시간 하역을 하고 군부대를 동원하는 등 병목 현상을 완화시키려는 노력 덕분에 바다에서 하역을 대기 중인 배들은 줄어들고 있으나 중국 항구만 해도 여전히 250척의 벌크선이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로 인해 올해 좋았던 업황이 내년에도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은 내년 글로벌 해상물동량이 올해보다 3.2% 증가한 124억톤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박 공급은 증가하겠지만 항만 혼잡 때문에 컨테이너선은 4%, 벌크선은 3%씩 공급이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해 운임일 견인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탱커에 대한 전망은 달랐다. 내년 탱커 교역량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10% 감소해 운임도 계속 약세를 이어간다는 시각이다.
유조선, 석유제품 운반선 등을 지칭하는 탱커는 컨테이너선, 벌크선과는 달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BDI, SCFI의 상승폭을 못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작년 코로나19 팬데믹 발발로 국제유가가 급락했을 당시 원유 저장용 수요가 늘어 운임이 폭등하기도 했으나, 일시적인 왜곡현상이 사라지자 운임도 다시 내려왔다. 그 후로 1년여 동안 탱커 운임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최근엔 손익분기점을 밑돌기도 했다.
과거 탱커 시황은 국제유가를 따라가는 성향이 강했다. 유가가 오를 때 산유국들이 증산하면 원유 운반 수요도 함께 증가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관계가 무너졌다. 올해 유가는 뚜렷한 강세를 그리고 있으나 탱커 운임은 아직 바닥권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태다.
주된 원인은 공급과잉에 있다. 수요 부진으로 물동량은 늘지 않는데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 등의 숫자는 넘쳐나는 것이 운임 상승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노후선박 해체가 부진한 것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운임이 안 좋을 때 오래된 선박을 해체해서 고철가격이라도 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금은 폐선하겠다는 VLCC 숫자가 미미한 상황이다. 반면 지난주 VLCC 해체가격은 LDT(톤, 고철의 무게)당 590달러로 5년래 최고 수준에 달한다.
현재 운항 중인 VLCC 5척 중 한 척은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에 대응이 힘든 15년 넘은 노후선박이다. 당장 해체해도 될 노후선박 비중이 9.6%에 달한다.
이렇게 배가 많은데도 VLCC 발주 및 신조선가는 슬금슬금 오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올해 상반기 발주된 탱커는 1808만DWT(순수화물 적재 톤수)로 2015년 상반기(2178만DWT) 이후 최대 규모다. VLCC 신조선가는 지난 20일 기준 1억800만달러를 기록, 지난해 말보다 27% 올랐다.
다만 원자재가 상승이 신조선가를 밀어올리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VLCC는 다른 선종에 비해 후판이 많이 쓰여 선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산유국들의 원유 증산과 노후선박 해체 증가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상황이 이어질 전망이다.
OPEC+는 지난 8월부터 매일 40만배럴씩 원유를 증산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일부 산유국들의 생산 차질로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영국 해운조사기관 깁슨에 따르면 40만배럴을 증산한다고 해도 VLCC 수요로 환산하면 월간 4척 정도에 불과해 운임에는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
미국 등 전 세계 소비국들은 추가 증산을 요구하고 있다. 시장 조사시관 플랫츠의 설문조사 결과 아시아 정유사들은 OPEC+가 최소 80만배럴 이상 증산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현실의 탱커 시황은 아직 부정적인 측면이 커 보이지만 그럼에도 시장 참여자들은 운임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않고 있다. 해체선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OPEC+의 추가 증산도 가능하다는 시각이 많아서다. 운임도 거북이걸음으로 오르고 있다. 중동-중국항로 VLCC 운임은 올해 1월 이후 최고 수준(WS 41.0)을 돌파했다.
배기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최근 노후선가 대비 해체선가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과거 슈퍼사이클 이후 2011~2013년, 2018년 탱커 선사들이 대규모 폐선을 결정했던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며 “산유국들이 대규모 증산을 이행하기 전에 대규모 선대가 퇴출된다면 탱커 운임 서프라이즈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원유 재고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내달 4일 열리는 OPEC+ 회의에서 12월분 추가 증산을 결정할 경우 탱커 시황에는 좋은 일이다. 난방유 수요가 증가하는 겨울철에 들어서고 있는 점도 긍정적이다. 여기에 미국과 이란의 핵 합의가 내년 1분기 안에 완료될 경우 이란산 원유가 국제시장에 복귀해 유가의 하방압력을 키울 것이라는 점도 기대해볼 만한 변수다.
노르웨이의 투자은행 아크틱 시큐리티즈는 신흥국의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선진국을 따라잡으면서 향후 몇 달 간 원유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을 근거로 ‘지금보다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탱커 선주와 투자자들을 지탱하고 있다.
배 연구원은 “탱커 선주들이 일종의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만큼 시황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가능성 높은 기대감에 주목하는 일부 발 빠른 투자자들은 탱커의 바닥 탈출을 눈여겨보고 있다. 팬데믹 이후 지난 5월까지 1년 넘게 이어진 HMM의 10배 폭등 과정을 통해 최악이던 시황이 돌아설 경우 주가 상승폭이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탱커 비중이 큰 상장기업이 없다. 흥아해운과 와이엔텍은 화학제품을 운반하는 탱커를 운용 중이라서 거리가 있고, 원유 운반선이 있는 SK해운은 비상장 기업인데다 개인 유통 물량이 없어 현실적으로 거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VLCC 등 원유 운반에 쓰이는 선종을 보유한 기업에 투자하고 싶다면 해외주식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탱커 주력 해운업체로는 유로나브(Euronav), 프론트라인(Frontline), DHT홀딩스, 티케이탱커스(Teekay Tankers) 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모두 미국 기업이 아니지만 미국 시장에 상장했다는 점이다.
유로나브(Euronav)는 벨기에 선사다.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ULCC(극초대형 원유운반선) 2척을 비롯해 VLCC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유선박 82척 중 2척의 FSO(하역용 선박)를 제외한 모든 선단이 유조선이며, 현재 건조 중인 12척을 포함하면 94척에 이른다.
덩치가 크니 위험에 대한 노출도 커 탱커 시황 악화와 함께 회사 실적도 망가졌다. 지난해 4분기부터 이익 뿐 아니라 매출도 크게 감소했다. 올해 상반기엔 적자를 기록 중이다.
적자 신세인 건 노르웨이 선사 프론트라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숫자만 보면 유로나브보다는 그나마 사정이 나아 보인다. 작년에는 매출액과 영업이익 모두 유로나브에 뒤졌지만 올해는 둘 다 앞서 있다. 적자폭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게다가 시가총액은 더 적어 밸류에이션 측면에서도 좀 더 돋보인다. 그 덕분인지 주가도 작년 말 대비 48% 올랐다.
DHT홀딩스는 마샬군도에 설립된 회사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보유선박은 26척. 앞의 두 해운사에 비하면 덩치가 훨씬 작다. 그래도 실적은 상반기까지 잘 방어했다. 2분기에도 적자는 벗어났다.
지난 2분기 실적이 크게 감소하자 자사주 매입과 현금배당(주당 0.02달러)을 결정,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DHT홀딩스는 2분기까지 46분기 연속 배당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어려운 가운데에도 계획대로 새로운 배를 인도받으며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이다.
중형 유조선이 주력인 캐나다 티케이탱커스의 경우 시총은 DHT홀딩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매출액은 그보다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자체 선박과 임대선박을 더해 총 131척의 선단을 운용 중인 스콜피오탱커스는 원유보다 정제한 석유제품을 주로 운송하는 해운업체다. VLCC보다는 작은 체급인 LR, MR 탱커선박 비중이 높다. 업황은 원유 운반선과 다를 게 없어 역시나 적자의 늪에 빠져 있지만 주가 상승률은 가장 높았다.
무엇보다 올해 이들이 기록한 주가 상승률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대부분 오른 것이라는 점이 투자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기대감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 그 첫 단추는 다음달 OPEC+ 회의에 달려 있다.
탱커 선사 유로나브(Euronav)가 보유하고 있는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Aquitaine호. <사진/ 유로나브 홈페이지>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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