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 한 달 가까이 집안 곳곳을 정리했다
. 요즘 인기를 끄는
TV프로그램
‘신박한 정리
’를 열심히 보던 아내가 뭔가 결심한 듯 물건을 비우기 시작했다
. “왜
?”란 질문을 할 겨를 도 없었다
. ‘울며 겨자 먹기
’로 나 역시 함께 했다
.
우선 무거운 물건 내다버리기가 내 몫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4층 계단을 수십 번 오르내리며 책상 책장 TV장식장 그리고 소파까지. 팔은 후들거리고 눈 앞은 몽롱하며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고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내가 스티커 벽지를 내민다. ‘셀프 도배’란다. 아내가 정말 작정한 것 같았다. 그렇게 큰 것들을 비워낸 자리를 새롭게 단장했다. 하지만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한 거란다. 작은 물건 비우기가 시작됐다.
우선 15년을 쓴 책상 속 물건 정리에 나섰다. 자리 잡고 앉아 15년 세월을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물건’을 분류했다. 우선 난 엄청난 물량에 놀랐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언젠가’란 기대로 끌어 안고 있던 보물들이었는데, 지금은 버려야 할 ‘쓰레기’로 눈앞에 쌓여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놀란 건 내가 붙잡고 있던 ‘희망’ 또는 ‘미련’의 양이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집안 구석마다 쌓아둔 ‘희망’ 또는 ‘미련’의 엄청난 양에 새로 산 수납장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정리를 거듭하는 과정은 어느 순간 통증이 됐다. 여기 있는 것들은 한때의 내가 그토록 붙잡고자 했던 꿈과 미래였는데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이란 현실 앞에 한낱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그 동안 난 꿈과 미래를 잊고 살았던 것일까, 내 삶의 정리에 게을렀던 걸까. 시간의 통제에 끌려 다니며 유통기한을 향해 달려가는 시한폭탄처럼 목적 없이 앞으로만 내달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최소한 ‘이것’들을 보면서 느껴진다.
선택의 시간이다. 내 꿈과 미래를 ‘희망’이란 이름으로 남겨둘 것인지 ‘미련’이란 이름으로 폐기처분 할 것인지. 난 전자를 택했다. 지금 선택은 15년 전과는 분명 다르다. 이젠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내 삶을 한 번 정리하고 난 후 스스로 의지로 다시 선택한 현실이다. 연말부터 이어진 ‘신박한 정리’가 자칫 폐기처분 될뻔했던 막연한 꿈과 미래를 현실적 희망으로 바꾼 순간이 됐다.
물건이 정리되면 공간이 생기고, 삶이 정리되면 여유가 생길 수 있다. 최근 IPTV로 작년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 한 편을 다시 봤다. 그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때는 보지 못했을까’ ‘저런 장면이 있었나’ 싶다. 삶이 정리된 후 생긴 마음의 여유가 시각까지 넓혀준 기분이다.
2021년 영화계도 그럴 수 있길 바란다. ‘코로나19’로 고사 직전에 몰린 영화산업이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이 말 밖에 할 수 없지만, 영화계도 ‘신박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 버려야 할 과거의 유물은 미련 없이 버리고 잊고 있던 희망은 다시 현실로 끄집어내 발굴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통해 더 많이 성장하고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대한민국 영화산업이 되길 기대한다. 모두 잘 될 것이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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