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괴물’ 김기덕을 기억하는 법
2020-12-23 00:00:01 2020-12-23 00:00:01
내 기억 속 영화감독 고 김기덕은 괴물이었다. 영화적 재능에서도,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그가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은 분명 엄청나다. 또한 그에 버금가는 논란도 크다. 나는 그를 추모하진 않지만 기억할 뿐이다. 그에 대해 글을 쓰는 나만의 방식으로 다만 기억하겠다.
 
김 감독에 대한 첫 기억은 2004년 초. 영화사마리아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였다. 지금은 사라진 충무로 스카라 극장. 당시 극장 로비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기자들에게 쏟아냈다. 토씨 하나까지 또렷하진 않지만 대략 이 정도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들의 지적 수준이 그만큼 모자란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 말을 들은 많은 기자들이 자리를 박찼다. 당시로서도 지금에서도 전대미문이란 단어가 부족함이 없는 충격이었다.
 
풍문으로 들리는 그의 사생활, 영화 현장에서 전해지는 그의 언행 그리고 기자들 시선에 담긴감독 김기덕인간 김기덕사이의 괴리감. 그 모든 것들은 그를 점점 더 괴물로 만들어 갔다. 타지에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세상은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인과응보라고 해도 달리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다.
 
괴물은 그의 영화 속에서도 존재했다. 그의 영화엔 언제나 남성 안에 내재됐다고 믿는 폭력성이 살아 있었고 여성을 향한 권력적 소유욕과 도구화가 팽배했다. 그를 이슈의 중심에 올려놓은 왜곡된 것처럼 비춰진 성의식도 마찬가지였다. 그 괴물 같은 욕망 덩어리들을 마주한다는 건 때때로 고통이기도 했다. 시궁창의 썩은 냄새를 맡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게 되면서도남성으로서 태생적으로 가진 것이라 여긴 무의식적 죄책감이 툭툭 건드려졌다. 이런 측면 때문에 그는 욕을 먹으면서도 반대로 광적인 팬덤을 동시에 거느리게 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주류가 아니다. 학력도 그랬고 살아온 인생도 그랬다. 때문에 국내 영화계에서 철저하게 배제 당했다. 2004년 영화빈집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 출품 한국영화로 선정됐다가 나중에 취소된 해프닝 역시 이런 맥락에서가 해석돼도 무리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의 작품엔 저항성이 있었다. 기존 사회 질서 파괴, 권위에 대한 저항, 그의 행보는 한국 영화계를 향한 아나키스트적 측면에서 분명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는 더 강하고 센 작품들을 악착같이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김기덕 영화를 유럽 영화계가 주목했다. 그의 작품들을예술로 칭송하며 그를세계 3대 영화제 수상 기록을 가진 유일한 한국영화 감독반열에 올려놨다. 김 감독에게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긴 피에타에 출연한 배우 조민수는유럽에서 김기덕은 영화의 신이었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긍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생활 논란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    
 
김기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폭력과 섹스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진기괴한 남성이었을까. 아니면 영화란 수단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현실을 비꼰저항의 아이콘이었을까. 영화 재능으로서도괴물이었지만 내재된 감정의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그것을 능가했던 김기덕. 그의 삶은 그의 영화와 닮았다. 삶의 마지막 모습까지 그렇다. 자신의 마지막 영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을 정도로.
 
삼가 고인을 이렇게 기억할 뿐이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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