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장 큰 고민이자 인생의 과제다
. ‘과연 우리 사회가 내 아들을 받아줄까
’란 고민
. 올해
12세인 아들은 발달장애인이다
.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들에게서
“아빠
”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 하지만 아들은 늘 말해왔다
. 말은 못하지만 자신만의 언어로 아빠인 나를 부르고 내게 말을 건네고 세상에 대화를 걸어왔다
. 아들의 말은 누군가에겐
‘다름
’이 되고
, 누군가에겐
‘틀림
’이 되고
, 누군가에겐
‘동정
’이 되며 안타깝지만
‘혐오
’가 되기도 한다
. 그래서 고민이다
. 언젠가 내가 떠나는 그 날
, 아들은 내가 없어도 이 세상 속에서 나와 당신과 우리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
이 세상은 커다란 인식의 창으로 구성돼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현대 사회에선 매스미디어가 사람들의 인식을 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매스미디어가 만들어 낸 발달장애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발달장애인 아들과 매일의 현실을 사는 ‘아들의 아빠’ 입장에선 사실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지에 의해 다름이나 틀림이 강조될 때도 있고 동정으로 포장된 혐오가 읽힐 때도 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해오던 생각대로 생각하려 한다. 생각의 습관 속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형성된 관계는 삶의 틀을 만들어 간다. 습관대로 생각하다 보니 ‘발달장애’란 단어를 들으면 그 단어 하나에 모든 것을 가둬버린다. 발달장애인과는 관계도 삶도 다르게 형성한다.
그런 방향에 앞장서고 있는 게 매스미디어다. 많은 경우 매스미디어는 발달장애인을 비장애인을 위한 이해의 도구로 소비한다. 불쌍하고 안된 그들을 이해하자며 발달장애인에 대한 감동적인 서사를 늘어놓거나 힘든 일상을 부각해 동정을 유도한다. 때론 자신들도 모르게 장애혐오를 쏟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발달장애를 소비하는 목적은 ‘이해와 포용’을 위해서다. 아들의 아빠인 내 눈엔 “너희를 이해했으니 이젠 우리에게 와도 좋다”는 선심이나 허락처럼 보일 뿐이다.
발달장애인이 세상 속에서 함께 살기 위해선 비장애인의 이해나 허락을 받아야 할까. 비장애인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허락하지 않으면 내 아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이럴 자격과 권리가 나와 당신 같은 비장애인에게 있는 것일까. 발달장애인은 이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가.
끔찍한 기분이 드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느낀 단상이다. 영화 속에 발달장애인이 나온다. 그는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와 당신처럼 그저 세상의 일원이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속 세상은 그를 거부했다. 비장애인들은 자신을 지키려 했던 발달장애인 행동을 혐오했고, 혐오는 폭력이 됐다. 폭력은 그를 울타리 밖으로 내몰았다.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됐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 눈빛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까.
살아가는데 장애와 비장애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삶, 당신의 삶, 우리의 삶, 그 안의 관계가 문제다. 이것이 기본이 돼야 했다. 굳이 영화란 매스미디어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장애’를 강조할 이유는 없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소재로 ‘장애’가 소비될 필요가 없다. 그런 매스미디어 인식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 인식을 유도한다. 편견으로. 편견이 습관이 되도록.
아들이 살아갈 세상이 점점 더 끔찍해지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떠난 어느 날, 세상은 아들을 받아들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본다. 아들은 과연 이런 사회를 받아들이려 할까.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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